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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달빛이 이지러는 졌으나 
여전히 밝으매 밤인지도 모를만치 눈부셔서 
아래만 바라보는데도  
닳고 닳아 부서진 네 빛 알갱이들이 
나를 건드리매 바라보니 
하늘 끝도 모르고 퍼져서는 
나는 이것을 별이라 부를 테다. 


네 빛이 다하거든 내게 조각을 쥐여 주렴, 
거뭇해진 너를 보고서도 
언젠가 눈부시게 밝았을 너를 기억하리니.

어디서 왔지?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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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경

거쳐온 모든 과거들과 관계들과 희로애락의 조각들이
먼지 크기로라도 모두 쌓여왔더라면
진작에 돌무지 아래에 깔려버렸을 테지만
다행스럽게도

서로 녹여주고 녹아주거나 접어주고 접혀
어쩌다 한번씩만 몸 속 어딘가로 던져지다가
노을이 지는 저물녘이거나

눈 그친 밤의 달빛이거나
아니면 저기 어느 먼 집 불빛이거나에
눈길을 들어 몸을 돌리면
그때에도
매번은 아니고 가끔씩 살짝씩
내가, 나를, 네가, 너를,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비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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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눈동자에서 깨져가는
삶의, 추억의, 유년의, 슬픔의, 쓸쓸함의, 아주 작은 기쁨의, 
          ,                   ,                 ,
조각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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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아직 5월인데 이렇게 더운거 보면 
여름은 얼마나 더울까 걱정이 된다.
이런 더운 날에 어릴적 
엄마 손을 잡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닐때 
자비란 한조각도  보이지 않는 날씨에
자신들이 찜통 속에 
익혀지기를 기다리는
감자들 같다고 표현한  것이 
왜인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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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집

산 중턱 어딘가에
아파트로 치자면 2층쯤
우두커니 있는 달동네 대포집
메뉴는 가정식
된장찌개, 김치찌개, 백반,
그리고 가끔 나오던 고등어조림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항상 시키시던 탁주 한사발
그리고 대포집에서 기특하다고 주시던
술빵 한 조각
소주 한 잔이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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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유리

이 글을 보니, 자연스럽게 오래 전 쓴 이 글이 생각나서 달아봅니다.
구슬치기
심장이 버석거리는 유리구슬,
 
구덩이를 파고, 하나, 둘, 셋 구슬을 깐다.
 
그러고 나서 번들거리는 소매로 구슬을 보듬을 즈음, 의례
내 지붕위로 붉은 은하수가 지나간다. 하지만 그건,
내 구슬
 
그리곤, 난 부러 구슬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꿈은 구슬 같아서, 쉬 깨지고, 붙곤 한다.
 
숨을 쉴 때마다, 방귀를 뀔 때마다,
버석버석한 가루가 방 안 가득 차곤,
난 마른 기츰을 하고, 유리조각을 부스럭...
 
사람을 만났다, 그는 별빛처럼 빛난다, 그 빛에 내 눈이
조금씩 삭아내린다. 내 삭아내린 눈은 어디로 갈까..
 
수염이 나서야 다시 구슬을 꺼내본다. 이 구슬로 저 구슬을 따먹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팔을 들어본다. 소매 가득 유리가루가 묻어 있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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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명언으로 시작된 혼란

처음엔 그냥 좋은 문장 하나 찾았으니 대충 멋있는 척 올려보자였는데 이게 쉽사리 끝이 나질 않는다.
- Voltaire
완벽함에 이르기 위해 작업을 끝내지 못한다면 충분한 상태로 끝난 작업보다 못하다는 해석이 적당하다.

Le meglio è l'inimico del bene
볼테르(Voltaire)의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에 있는 내용으로 옥스포드 인용 사전에 수록되어 있다고 함.
2003년 구글 answers 에서 사용자들끼리 레퍼런스를 찾아내는 재미난 쓰레드도 있네.

The best is the enemy of good
좋고 나쁨의 여러 단계에서 사회통념적으로 영단어 "best"가 의미하는 단계를 어디로 보는가에 따라 문장의 느낌의 달라질텐데 나는 "best" 가 극도로 좋다는 표현으로 느껴지지 않아 Perfect가 사용된 문장이 좋다. 
The perfect is the enemy of good

인터넷에 '볼테르'의 명언으로 번역된 문구는 크게 2가지.
최선은 선의 적이다
"선(善)"이 "최선(最善)"에 못 미친 상태인건 맞는 것 같은데 "선"이라는 단어가 그 쓰임에 와닿지 않고 "최선"은 극한의 상태를 표현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돌직구같은 아래의 번역이 마음에 든다.

완벽함은 훌륭함의 적이다

그런데 제품을 만들어 사업을 하는 나는:

정말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아도 될까?
스티븐 잡스의 아이폰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제품의 아름다움과 강력함을 증명한 결과물이 아닌가?
완벽함을 포기하고 현재에 안주하고자 하는 내게 당위성을 부여하는 변명의 문장인가?
만약 완벽함이 아니라면 내 작업과 제품의 "훌륭함" 단계는 무슨 기준으로 정해야할까?
아, 머리 아퍼.
내가 이 문장에 왜 매달리고 있는거지?
그렇지만 뭔가 생각을 포기해버리면 안될 것 같은 기분.

내 친구 중에 부모님이 크고 아름다운 식당을 하는 친구가 있어.
어릴 때부터 잘 알던 친구고 그 집 부모님들과도 오래 알고 지내서 거기서 뭘 먹고 돈을 내본적이 없지.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 갈 때마다 식사를 마치면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가.
"어머니, 잘 먹었습니다. 여기, 5만원 맞죠?"

"이놈 봐라? 내가 니 돈 받겠냐? 맛있게 먹었으면 자주나 와라."
"어휴~ 어머니, 자꾸 돈을 안받으시니까 부담스러워서 못 오자나요."
"에라, 이놈아! 어여 가고 다음주에 또 와."
그런데 서로가 대사를 바꾸면 아주 골때리지.
"어머니, 저한테 돈 받으실거 아니죠? 또 올께요!"
"5만원이나 나왔는데 또 돈 안내고 그냥 가려고?"
"어휴~ 어머니 언제는 제가 돈 냈어요? 하루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아니 이놈아 공짜로 처먹을라면 1~2년에 한두번이나 오던가!"
뻔한 결론이 나와버렸네.
내 제품의 "훌륭함"을 내가 판단할 수 없다는 것.

비유로 든 얘기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래에 대한 얘기라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각자의 입장에서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것과 어떤 말을 입 밖에 꺼내면 웃긴 놈이 된다는 것.
제품의 사용자들이 제품의 훌륭함과 완벽함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제품의 훌륭함과 완벽함을 단정한다는 것이 이미 주제넘은 일인 것 같네.
이쯤에서 다시 한번, 내 사업이 인터넷/온라인 서비스에 기반하고 있음에 감사해야겠네.
이건 조각이나 벽화, 건축이나 공산품과 다르게 명확한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들을 작은 단위로 끊임없이 사용자에게 제공하고 실시간에 가깝게 어떤 단계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감사하네.
제품의 단계가 "완벽함 - 훌륭함 - 충분함 - 부족함 - 쓰레기" 다섯 단계라고 봤을 때 내 제품들은 아직 부족함과 쓰레기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이건 문자 그대로 "단계"인거야.
하나씩 해결하고 한걸음씩 내딛으면 결국 앞으로, 위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게임이지.
다들 힘내자구.


영문위키: Perfect is the enemy of good
+) 내가 대체 왜, 어디서 시작해서 어떤 전개로 여기까지 온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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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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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A:노력하면서 안 살면 어때? 그래도 다 살아가잖아.
B:네가 노력하지 않는 순간에,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를 뛰어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을 거야.
A:내가 누군가를 뛰어넘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또 나를 뛰어넘으면 어떡해?
B:그럼 네가 그들을 다시 뛰어넘어야지.
A:계속해서? 누군가가 나를 뛰어넘지 못할 때까지?
B:그런 셈이지.
A:그래서 얻는 건 뭔데?
B:네가 그들보다 위에 있다는 뿌듯함 정도겠지.
A:그들보다 위에 있어서 좋은 건 뭔데?
B:당연히 너의 밑에 있는 사람들이 널 우러러보겠지.정말 대단하다는 듯이, 그런 눈빛으로.
A:그럼 이제 다른 사람들을 다 뛰어넘고 맨 꼭대기에 도착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
B:아니지. 네가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가 너를 또 뛰어넘잖아. 그러면 넌 또 그를 뛰어넘어야지.
아니면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뛰어야지.
A:그럼 결국 맨 꼭대기라는 건 없는 거잖아.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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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어제 바보 같이 학원을 또 빠졌다.
이유는 숙제를 하지 않는 것
못한 것은 아니였다. 
그럼 왜 하지 않았으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하핫
그건 내가 진흙인형 같기 때문이다.
진흙인형은 한번 만지면 부셔저 버리니 불에 넣어 굳힌다. 그럼 다른 모양으로 된다는 선택지를 버리는 대신 영원히.  .  .  .  는 아니지만 반영구적으로  그 모습을 이루고 있을 수 있다. 
나는 그것과 같이 갇혀온 생활에 의해 모양이 잡히고 자신의 열등감이라는 불로  인해 금이  가버린 진흙인형이 되버렸다. 
만약 당신이 또는 당신의 자녀가 부셔진 인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버리겠다는 결정이다. 
부모라면 더 할것이다. 잘못하면 손이 다친다며 부셔진 장난감을 처리한다.
난 그 인형을 계속 가지고 있을것이다.
언제까지나 옆에 두며 손이 다쳐도 다시 낳는다며 웃으며 넘길 것이다.상처 난 손을 필사적으로  숨기면서 말이다.
난 그런 나를 가지고 있고 가끔씩 다치는 것이다.
어제는 그러한 날이었다.
분명 조심히 다루고 있었지만 진흙인형이 세월이 지나며 금이가고 부셔지듯이 나도 그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변화를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납두었고, 결국 상처를 입었다. 
웃긴것은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는 자신이다.
참으로 바보 같지 않나?
알리면 금방 손은 낳을텐데 참고 있었던 휴우증인지
지금은 입에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고장난 라디오같이.
지금은 그저 기다릴뿐이다.
내가 완벽히 고장나 
부셔저 
사라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