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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죄를 고백하는 것은 쉬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내 입을 막고 있었던 것은 가볍고 얄팍한 윤리 의식뿐이었으니까. 도덕책에서 배워 누구나 알고는 있는, 그래서 누군가에겐 경계고 벽이었으나, 나에게는 축축하게 젖어 언제든 찢어버릴 수 있는 종이에 불과했던. 그런 물기 고인 의식들.


 “…가출하고 소식이 끊겼던 Y, 이 년 전 실종된 A, 작년 봄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H.”


 아득할 만큼 멀었던 과거에서부터 시작했던 고백은 어느새 현재에 가까워져 있었다. 새파란 얼굴을 하고 부들부들 떨던 P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겁에 질린 개처럼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팔을 잡아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직이야. 아직 남았어.”

 “이… 이거 놔.”

 “작년 뉴스 일 면에 실렸던 연쇄 토막 살인 사건.”

 “놓으라고…!”


 P는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비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까부터 점차 퍼지던 미소는 어느새 완전한 웃음이 되어 있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목젖 아래서부터 끓어 넘쳤다.


 언제나 열망했다. 내 죄를 고백하는 나를 상상했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팔을 붙들고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죽였다고. 내가 한 짓이라고.


 “쓰레기…, 쓰레기 같은 새끼! 네가 사람이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게 의아했다. 왜 울지. 아직 제일 중요한 건 꺼내지도 않았는데.


 “내가 작년에 준 화분 기억나?”

 “…뭐?”


 앞뒤 없이 튀어나온 이야기에 P가 좁혔던 미간을 올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속삭였다. 



 “J는.”



 단지 이름 하나. 그 한 명의 이름으로 그녀의 모든 것이 멎었다. 몸부림치던 동작, 눈물, 목소리, 울음에 차 가늘게 떨리던 호흡마저. 마치 혼자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꼭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기억해?”


 크게 벌린 입가가 이내 일그러진다.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절망이었다. 그녀는 내가 바라던 대로 어떤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거든.”


 손을 놓자마자 P는 당장 거실로 내달렸다. 참기 어려울 만큼 뜨거운 감정이 가슴 한가운데를 터뜨렸다. 붕 떠오르는 것들을 애써 가라앉히며 방을 빠져나오자 마침 제 무릎까지 오는 화분을 들고 선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쉽게 던지지 못한다. 두려우니까. 그러나 팔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도기로 된 하얀 화분은 산산이 깨어졌다. 폭발하듯 흩어지는 산세비리아 사이로 흙투성이가 된 무언가가 밖으로 굴러 나왔다. 꼭 사람 머리처럼 생긴.


 P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가슴을 움켜쥔 채 곧 죽어버릴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다, 이내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터져 나오는 쾌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여전히 오열하고 있었고, 나는 주방으로 가 식칼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왔지?
[["synd.kr", 19], ["unknown", 460]]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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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만남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그럼 어떻게 먹고 사세요? 내 무례하고 유치한 공격에 남자도 진부한 답변을 했다. 꿈을 먹고 살지요. 여전히 미소가 마르지 않은 가벼운 얼굴이 속을 답답하게 했다. 오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꿈이 선생님의 밀린 전기세를 해결해 주지는 않잖아요. 그러자 그의 웃음이 진해진다. 그래서 요즘 양초를 켜요. 생각보다 쓸만합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피웠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비수처럼 던져뒀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하다. 짐승을 찌를만큼 날카롭게 갈아낸 칼날도 그의 가죽은 뚫지 못할 것이다.
허탈함이 지나간 뒤 따라온 건 졌다는 느낌이었다. 찻잔 끝에 말라붙은 커피의 색은 내 패배감과 같았다. 그러나 패인은 생각보다 뾰족했다. 내게는 맹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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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식욕

늘 맛있게 내려주는 커피만큼 괜찮을 줄 알았던 녹차는 기대보다 텁텁했다. 여기는 앞으로 커피만 시켜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던 책을 펼쳤다.
소설은 아직 초반부였으나 주인공은 벌써 사람을 세 명이나 죽였다. 발 앞의 난도질 당한 시신. 기분 나쁜 온기가 남아있는 핏물. 뱃속 깊숙이 박혀 잘 빠지지 않는 칼을 부득부득 빼내는 묘사에 식욕이 완전히 달아났다.
“사람 죽인 적 있어요? ”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한 여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아는 여자다. 맨 윗층에 사는, 집주인의 딸.
“있으면 여기서 커피는 못 마시겠지.”
최대한 억양을 덜어내고 대답했다. 목소리에 자칫 온기나 냉기가 묻어나지 않도록. 목덜미처럼 드러난 감정만큼 손쉬운 먹잇감은 없기 때문이다.
여자의 시선이 나에게서 내가 들고 있는 책 표지로 옮겨갔다. 핥는 듯한 시선에서 나른한 전의를 느꼈다.
“매일 이런 것만 읽길래, 연구라도 하는 줄 알았죠. 제목에 들어가는 단어부터 그렇잖아. 사건, 살인, 시체, 죽음.”
여자가 책 제목으로 나를 찌르는 동안 나는 그녀의 흰 살결을 본다. 푸른색 셔츠 깃 위로 뻗은 가느다란 목. 두 손으로 잡고 누르면 툭 부러지지 않을까.
누군가 토스트를 주문했는지 카페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문득 고개를 든 식욕이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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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


꿈속에서도 나는 자주 넘어졌다. 아니 쓰러졌다. 인생을 전부 잡아먹은 깊은 병증은 꿈까지 따라와 발목을 잡았다. 도피할 곳이 없었다. 잠시 잊을 수 있는 아주 조금의 틈조차.

지긋지긋해. 잠에서 깨면 그런 말부터 시작했다. 염증으로 불거져 나온 혈관만큼 검붉은 불평들이 입 밖으로 툭 툭 떨어졌다. 그러면 형은 언제나 말없이 그것들을 주웠다. 통증에 절어 신음처럼 가늘어진 목소리를 어깨에 둘렀다.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빼곡히 찔러 넣었다. 그렇게 무수히 반복되어 이제 더 이상 꽂힐 공간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형은 잔잔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게 지독하고 수치스러웠다. 형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그의 살점을 메마른 입 안 가득히 뜯어 먹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렇게 내 치부와도 같아진 행위의 반복만이 하루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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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가을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더운 건지. 추울까 일부러 챙겨온 블루종은 금세 귀찮은 짐이 되었다. 그늘이 있는 곳으로만 골라 걷다가 도서관에서 막 나오는 J와 마주쳤다. 녀석은 인사도 없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우와, 너 땀났어.”

그렇게 얇게 입고서 더워? 가디건 주머니에서 꺼낸 휴지로 내 콧잔등을 닦아주는 J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뭐 좋은 일 있냐? 툭 물어보니 배시시 웃는다.

“오다가 선물 받았거든. 보여줄게, 있어 봐.”

그러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열어 열심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금방 꺼내 보여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속이 얼마나 난장판인지 이미 여러 번 목격했던 나는 잔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야, 넌 제발 가방 정리 좀 해. 니가 도라에몽이냐.”
“내 라이프 스타일이야.”
“뭐? 그건 그냥 쓰레기장 스타일이야. 너 가방에서 봤던 것 중에 제일 황당했던 게 뭔 줄 알아? 탁상에 놓는 알람시계. 대체 그걸 왜 들고 다니냐고.”
“살다 보면 다 필요할 때가 오거든?”
“아니 핸드폰에 손목시계까지 꼬박꼬박 차고 다니면서 무슨…”
“찾았다! 선물!”

티격태격하는 동안 녀석이 선물을 발굴해냈다. 번쩍 꺼내 든 손에는 제과점에서 팔 법한 캔디 깡통이 들려 있었다. 그게 웬 거야?

“오다가 새터 앞에서 K오빠 마주쳤거든. 알바하다가 남아서 받았는데 자기는 단 거 안 좋아한다고 주시던데.”

아. 너무 뻔하다. 그런데 이렇게 빤히 보이는 걸 지금 이 멍청이만 모르고 있다. J는 신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노란색 사탕을 골라 세 개나 입에 넣었다. 저거저거 충치 걸려봐야 정신 차리지. 속으로 혀를 차는데 J가 내 쪽으로 깡통을 쑥 내밀었다. 먹을래? 알록달록한 사탕이 한가득 들어 있는 통 안이 한없이 발랄해 보였다. 이 녀석 머릿속이 아마 이런 색이지 않을까. 나는 포도 맛으로 보이는 보라색 사탕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 오빠 너 좋아해.”
“헐… 설마.”
“야, 말해두지만. 복학생은 안 돼.”

그러자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인마, 난 진지해. 다른 놈은 몰라도 그 오빠처럼 속 시꺼먼 복학생은 안 된다고. 다리로 툭툭 차대자 웃음이 더 높아진다. 햇빛을 베어 문 듯 눈부신 웃음 사이로 라임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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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머리와 가슴

한재권 박사, 김진우 작가의 발표로 기술과 예술에 대해 얘기하고, 송영주 트리오의 재즈 공연을 감상하고.
머리도 가슴도 새록새록했던 타작의 두번째 융복합 살롱.
재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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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밤

우선은 다짐을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글로 다짐을 서술하진 않았다. 글로 다짐을 서술하는 순간 난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가혹하게도 분풀이는 그것으로 끝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은 확고하게 다지고 강인하게 정신을 차렸다. 맹렬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며 이 분노에 대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출하지만 가슴 속 깊이 담았다. 다짐은 분풀이로 끝나지 않았다.
찬찬히 고민해보자, 그/그녀를 죽일 수 있는 방법.
이 내 감정은 천천히 시행하고도 싶었고, 아주 빠르게도 처치하고 싶은 강렬하지만 차갑게 식은 분노, 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분노. 들끓는 분노에 손끝이 벌벌 떨리고 심장 속에는 어느 여자/어린아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명이 울리고 있다.
찬찬히 고민해보자. 어디서 부터 시행할지.
우선 나는 그/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는다. 그 차갑다 못해 시린 가슴을 유지하여라, 그 어떤 얼음, 추위에도 비할 수 없는, 그 어떤 뜨겁고도 활화산 같은 사람/사랑이 다가와도 녹아내리지 않는, 달아오르지 않는 시린 가슴을 유지해야 한다.
오랫동안 단련된 상처로 덕지덕지 딱지 앉은 나의 심장은 이제 눈물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그/그녀의 죽음은 나에게 아주 객관적이고도 진실한, 희망하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에 가장 괴로워해야할 그/그녀는 설령 나의 앞에서 죽음을 받아들지 못하고 울어버린다면 그것또한 나의 다짐을 확고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두가 나에게 묻거든 그/그녀는 죽었다고 전하자. 무미건조한 발음으로, 미사어구 없는 간단한 구조의 단어. 단호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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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또 다시 호숫가에 섰을 때
다시 또 가슴 설레길 바라지는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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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바다

가고 싶다
가서 보고 싶다
가슴이 시원해진다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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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서*

나비야, 이제 그만 내려앉아도 가슴 덜 시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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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엔요.
고사리 같은 작고 통통한 손을 가슴에 곱게 모아서 나에게 총총총 수달이 왔습니다.
와선 살포시 가리비 껍질을 놓아놓곤 내가 쵸다만 보고있으니 만지라고 조개껍질을 톡톡톡 치더군요.
아직도 얼마나 생생한지..
태몽일까요??? 
성모 마리아처럼 혼저서두 아이를 가질수이는건가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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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아

머리는 윙윙거리고 아랫배는 꾸물거리고 가슴은 꽉 막혀 움틀댄다.
살껍질을 기준으로 안으로 밖으로 너무나 허무하다.
개같음이 안에서 밖으로,
개같음이 밖에서 안으로.
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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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외로움

혼자가 익숙한 제게
외로움은 위안이었습니다.
누구도 이해 못할 고독을 훈장처럼 가슴에 박아넣었습니다.
둘이되고 셋이되니 좀 후회스럽습니다.
이들이 제 가슴에 구멍을 힘겹게 메워나가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