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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k <Rod Long / Unsplash>

고장난 선풍기

이 여름에 선풍기가 고장나면 어쩌란 말이냐.

손부채질을 하며 고장난 선풍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눈짓 한번에 고치는 초능력은 없어 달라지는 게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찬 물을 담은 페트병에 수건을 감아 배 위에 올리고 대나무돗자리위에 누웠다. 바람도 덥고 해도 더운데 게으름만 늘었다. 선풍기 대신 부채질을 해야겠다. 기계가 일하지 않으니 노동력을 쓸 수밖에. 부채를 찾아 손에 쥐니 할머니 생각이 난다. 지붕 그늘 밑에서 수박을 먹고 누워있으면 불어오던 바람. 할머니 부채질. 솔솔 부는 바람이 할머니 손길같이 축 늘어진 머리를 넘긴다. 아, 따끈하고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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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뜨거운 공기가 헐떡이는 개처럼 아스팔트 도로위를 느리게 맴돈다. 정신사납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며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덥다. 그저 덥다. 손에 들고 있는 부채로 바람을 만들어 보지만 공기 자체가 뜨거운탓에 시원하긴 커녕 짜증만 난다. 에어컨 실외기 옆에 서있는 느낌이다. 부채를 가방에 넣고 주위를 둘러본다. 은행이나, 카페. 하다못해 책방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주위는 하늘로 뻗어나간 고층빌딩들탓에 눈이 부시고 바람 한점 불지않는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걷는다. 여름여름여름. 지겨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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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우리가 무언갈 하든 하지 않든 계절은 돌아온다. 변함없는 건 돌아온다는 사실 뿐이고 언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오래 머무는가는 그도 매번 바뀌었다. 우리가 뭘 하든, 여름은 돌아온다.
관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미 완전히 망가진 것이었지만 그나마도 가짐과 아예 없음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습게도 그랬고 나는 그대로 소리내어 웃었다. 이까짓게 뭐라고 공허함이 느껴지는지, 심지어는 아쉬워지는 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네 웃음소리가 겹쳐들렸다. 영락없는 비웃음이라 나는 웃음을 뚝 그쳤다. 매미소리가 방 안을 메우고 있다. 창에 들러붙었는지 유난히 시끄럽다. 크게 착각한 수치를 느끼고 싶어도 주변에 널린 건 먼지와 쓰레기 뿐이었다. 감정이 존재하려면 관계가 우선이다. 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려면 필요한 감정이 있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세상은 닭과 달걀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절이 왔음을 알 수 있는 몇가지 단서가 있다. 가령 사람들은 서늘한 밤에 낙엽이 지면 가을이 온 줄 알았다. 눈이 오면 겨울이 온다. 꽃이 피면 봄이 왔다고들 했다. 하지만 우리 집엔 늘 네가 그렇게도 좋아한 덕에 매일 꽃이 꽂혀있었으므로 나는 봄을 모르고 지나갔다. 밖에 나갈 일 없으니 가을바람을 맞을 새도 없었고 다만 느껴온 건 여름과 겨울 뿐이다. 차갑고 맛없는 도시락을 세 숫갈 겨우 들고서 무료하고 무기력하게 방 바닥에 엎드렸을 때. 바닥이 습기로 끈적거리면 여름이었고 대리석처럼 차가우면 겨울이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여러가지가 달라졌다. 아버지가 떠났고 네가 죽었다. 내가 바닥에 납작 들러붙기도 전에 여름은 시작해버렸고 매미가 울고 있었다. 의식하고 나니 귀가 따가워 나는 신경질을 내며 발로 창문을 걷어차 매미를 날려버렸다. 그새 움직였다고 열이 오르는 몸을 식히려 그나마 서늘한 벽에 몸을 기대 앉았다. 노이로제처럼 멀거니 매미소리가 들렸다. 집에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었다. 부채도 없었다. 매년 여름은 더더욱 더워졌다. 그는 늘 스스로와 싸움을 했고 늘 이겼다. 아직은 초여름이지만 이대로라면 나는 이 방 안에 통째로 갇혀 열병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나가지 못한 열이 내게로 들러붙은 채로 겨울을, 아니면 나는 모르는 가을을 기다릴 것이다. 
여름이 왔다. 공기가 눅눅하게 무거워지고 더는 시원한 바람을 맞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눅눅한 열에 갇히다 보면 어느 순간 여름이라 한다. 나도 전엔 사계절을 모두 알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엔 가을 겨울이 되면 여름의 생기가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선명한 색상으로 파란 하늘에 맴맴 울리는 소리를 그리워했다. 이제서 아무 의미 없는 그리움을 떠올리는 건 더위를 먹어서일까. 여름은 생각만큼 파랗지 않다. 눈오기 직전 구름 낀 하늘보다 더 흐리고 잿빛이다. 땀이 차 들러붙기 시작한 겉옷을 벗었다. 흰 양말은 여전히 짝짝이었지만 어째 벗을 생각을 않는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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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충

퇴충! 그것은 퇴직급여충당금의 줄임말이다. 퇴직연금충당금과는 다르다.
퇴직급여충당금은 회계에서는 확정급여채무라고 일컬어지나 세법에서는 퇴직급여충당부채라고 불린다.
퇴직연금충당금은 당기말 추계액 중 당기말 퇴직급여충당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과 외부적립한 금액 중 작은 부분을 의미한다. 지금은 세법상 퇴직급여충당금잔액의 산출요령을 공부하고 있는데 존나 머리에 안 들어오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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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복잡한 주택가를 올라가는 길, 자주 지나가던 골목에 있는 집은 오늘도 불이 꺼져있었다.
아,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리다보니 눈에 익었다. 빌라의 3층이라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 커튼도, 사람의 흔적도 없이 열려있는 창문, 불 켜진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집은 마치 세계가 달라지는 기점 같았다.
어두운 그 안을 보고있자면, 인기척 하나 없는 어두움을 응시하자면 그 집 안에 들어가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멈추고 밤이 깜깜할때는 마치 온 우주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불이 켜진 상가와 바삐 오가는 사람들은 지구에, 나는 외우고있는 별의 순서에서도 맨 끝인 명왕성에 있다. 행성의 지위도 잃어버린 왜소행성에.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존재조차 희미한 별인 명왕성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