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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길이 캄캄했다. 점점 심해지는 배앓이가 아침에 뾰족이 가다듬었던 것들을 엉망으로 흐트러트렸다. 집에 가려면 아직 오백 걸음이나 남았는데. 노인처럼 허리를 숙이다 결국 주저앉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 위로 노랗게 번지는 가로등 불빛만이 나를 알았다. 육지에서도 바다 위처럼 한없이 침잠하는 나를.


 이마와 땅이 가까워지면 그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스쳐 지나간 것들. 탈이 난 배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과 술에 절어 나를 걷어차던 아빠의 발. 어린 기억을 고백하며 다시 더듬어야 했던 마른 흉터. 수치로 발갛게 부어오른 나를 끌어안았던 후배의 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문을 안줏거리로 씹어대던 이들. 관망하던 눈들. 가을이 다 되도록 울던 매미. 학사에 휴학 신청서를 밀어 넣고 도망쳤던 날, 진탕 취한 채 찾아와 형이랑 자고 싶어요, 울면서 매달리던 후배. 모진 마음을 먹고도 무너진 것은 때린 네 뺨이 데일 것처럼 뜨거워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 너무 엉망이어서.


 창이 반 토막 난 단칸방. 닳디 단 이불. 처음으로 벗겼던 타인의 옷. 하얗게 드러나는 맨살에 혼곤해지던 정신. 입을 맞추다가도 몸을 떨게 했던 안을 헤집는 낯선 감촉. 하얗게 물드는 손끝. 솜털 사이사이 숨결이 밸 만큼 가까이, 서로의 체온을 포갠 채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속삭이던 그때.

어디서 왔지?
[["synd.kr", 29], ["unknown", 199]]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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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만남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그럼 어떻게 먹고 사세요? 내 무례하고 유치한 공격에 남자도 진부한 답변을 했다. 꿈을 먹고 살지요. 여전히 미소가 마르지 않은 가벼운 얼굴이 속을 답답하게 했다. 오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꿈이 선생님의 밀린 전기세를 해결해 주지는 않잖아요. 그러자 그의 웃음이 진해진다. 그래서 요즘 양초를 켜요. 생각보다 쓸만합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피웠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비수처럼 던져뒀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하다. 짐승을 찌를만큼 날카롭게 갈아낸 칼날도 그의 가죽은 뚫지 못할 것이다.
허탈함이 지나간 뒤 따라온 건 졌다는 느낌이었다. 찻잔 끝에 말라붙은 커피의 색은 내 패배감과 같았다. 그러나 패인은 생각보다 뾰족했다. 내게는 맹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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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식욕

늘 맛있게 내려주는 커피만큼 괜찮을 줄 알았던 녹차는 기대보다 텁텁했다. 여기는 앞으로 커피만 시켜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던 책을 펼쳤다.
소설은 아직 초반부였으나 주인공은 벌써 사람을 세 명이나 죽였다. 발 앞의 난도질 당한 시신. 기분 나쁜 온기가 남아있는 핏물. 뱃속 깊숙이 박혀 잘 빠지지 않는 칼을 부득부득 빼내는 묘사에 식욕이 완전히 달아났다.
“사람 죽인 적 있어요? ”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한 여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아는 여자다. 맨 윗층에 사는, 집주인의 딸.
“있으면 여기서 커피는 못 마시겠지.”
최대한 억양을 덜어내고 대답했다. 목소리에 자칫 온기나 냉기가 묻어나지 않도록. 목덜미처럼 드러난 감정만큼 손쉬운 먹잇감은 없기 때문이다.
여자의 시선이 나에게서 내가 들고 있는 책 표지로 옮겨갔다. 핥는 듯한 시선에서 나른한 전의를 느꼈다.
“매일 이런 것만 읽길래, 연구라도 하는 줄 알았죠. 제목에 들어가는 단어부터 그렇잖아. 사건, 살인, 시체, 죽음.”
여자가 책 제목으로 나를 찌르는 동안 나는 그녀의 흰 살결을 본다. 푸른색 셔츠 깃 위로 뻗은 가느다란 목. 두 손으로 잡고 누르면 툭 부러지지 않을까.
누군가 토스트를 주문했는지 카페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문득 고개를 든 식욕이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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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


꿈속에서도 나는 자주 넘어졌다. 아니 쓰러졌다. 인생을 전부 잡아먹은 깊은 병증은 꿈까지 따라와 발목을 잡았다. 도피할 곳이 없었다. 잠시 잊을 수 있는 아주 조금의 틈조차.

지긋지긋해. 잠에서 깨면 그런 말부터 시작했다. 염증으로 불거져 나온 혈관만큼 검붉은 불평들이 입 밖으로 툭 툭 떨어졌다. 그러면 형은 언제나 말없이 그것들을 주웠다. 통증에 절어 신음처럼 가늘어진 목소리를 어깨에 둘렀다.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빼곡히 찔러 넣었다. 그렇게 무수히 반복되어 이제 더 이상 꽂힐 공간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형은 잔잔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게 지독하고 수치스러웠다. 형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그의 살점을 메마른 입 안 가득히 뜯어 먹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렇게 내 치부와도 같아진 행위의 반복만이 하루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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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죄를 고백하는 것은 쉬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내 입을 막고 있었던 것은 가볍고 얄팍한 윤리 의식뿐이었으니까. 도덕책에서 배워 누구나 알고는 있는, 그래서 누군가에겐 경계고 벽이었으나, 나에게는 축축하게 젖어 언제든 찢어버릴 수 있는 종이에 불과했던. 그런 물기 고인 의식들.
 “…가출하고 소식이 끊겼던 Y, 이 년 전 실종된 A, 작년 봄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H.”
 아득할 만큼 멀었던 과거에서부터 시작했던 고백은 어느새 현재에 가까워져 있었다. 새파란 얼굴을 하고 부들부들 떨던 P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겁에 질린 개처럼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팔을 잡아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직이야. 아직 남았어.”
 “이… 이거 놔.”
 “작년 뉴스 일 면에 실렸던 연쇄 토막 살인 사건.”
 “놓으라고…!”
 P는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비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까부터 점차 퍼지던 미소는 어느새 완전한 웃음이 되어 있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목젖 아래서부터 끓어 넘쳤다.
 언제나 열망했다. 내 죄를 고백하는 나를 상상했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팔을 붙들고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죽였다고. 내가 한 짓이라고.
 “쓰레기…, 쓰레기 같은 새끼! 네가 사람이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게 의아했다. 왜 울지. 아직 제일 중요한 건 꺼내지도 않았는데.
 “내가 작년에 준 화분 기억나?”
 “…뭐?”
 앞뒤 없이 튀어나온 이야기에 P가 좁혔던 미간을 올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속삭였다. 
 “J는.”
 단지 이름 하나. 그 한 명의 이름으로 그녀의 모든 것이 멎었다. 몸부림치던 동작, 눈물, 목소리, 울음에 차 가늘게 떨리던 호흡마저. 마치 혼자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꼭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기억해?”
 크게 벌린 입가가 이내 일그러진다.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절망이었다. 그녀는 내가 바라던 대로 어떤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거든.”
 손을 놓자마자 P는 당장 거실로 내달렸다. 참기 어려울 만큼 뜨거운 감정이 가슴 한가운데를 터뜨렸다. 붕 떠오르는 것들을 애써 가라앉히며 방을 빠져나오자 마침 제 무릎까지 오는 화분을 들고 선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쉽게 던지지 못한다. 두려우니까. 그러나 팔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도기로 된 하얀 화분은 산산이 깨어졌다. 폭발하듯 흩어지는 산세비리아 사이로 흙투성이가 된 무언가가 밖으로 굴러 나왔다. 꼭 사람 머리처럼 생긴.
 P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가슴을 움켜쥔 채 곧 죽어버릴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다, 이내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터져 나오는 쾌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여전히 오열하고 있었고, 나는 주방으로 가 식칼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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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일기장에 적었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나는 너무나 헷갈리는 마음을 정리하고싶어 적었다.
그러나 더 엉망이 될 뿐이었다. 일기장은 그 얘기로 가득차 버렸고. 내 일상은 적히지 않았다. 내 일상이 그가 되어버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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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것

내 상황과 상반되어 점점 바라는 게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바라는 것을 이루려면 나 먼저 노력하는 것이건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이 하나 둘 씩 바라는 것만 더 많아지니 나 자신이 더 엉망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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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나는 쉴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꾸 빈둥대려고 한다. 글을 쓸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 어느새인가 글도 책도 멀리하게 되었다.
아직 심지는 많이 남았는데 불은 붙지도 않았다.  그을린 자국밖에 없다.  
그래도, 일단은 해보련다. 마치 처음으로 걷는 사람같이 글이 엉망이다.  사고는 정렬되지 않지만 마모되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불을 붙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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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끝없는 후회 속에서 지나갔다
이제 행복했던 기억도
가슴 시렸던 기억도
추억이란 것만 남긴 채
사라진 줄만 알았다
코 끝에 남아 있었다
밝게 웃고 있었던
힘에 부쳐 울고 있었던
그대 향기가 아리게 남아
숨 쉬는 매초마다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엉망을 만들어 놓고
떠나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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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아아...왜, 당신은, 이다지도. 이다지도.

햇빛을 받은 바다가 금빛 비늘처럼 반짝이는것이 보인다. 몇 천개의 빛나는 눈들이 눈꺼플을 깜박인다. 
나는 그 위로 고개를 들어 올린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태양은 온화한 빛을 내뿜는다. 너무나 멀고, 너무나 따스해보인다.
하지만 정작 내가 있는곳은 춥고 외롭다.
나는 벼랑 아래 그늘진 모래톱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고요한 냉기가 무릎을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따가운 모래가 들러붙는다. 조금의 온기라도 가지고 싶어서 두손을 허벅지에 대고 문지른다.
그러다가 울컥 눈물을 흘린다.
대체 몇번의 밤이 지나야 하는걸까. 몇십번의 상실이 있어야 하는걸까. 몇백번의 죽음을 겪어야 하는걸까.
나는 여인으로도 사내로도 살아봤다. 그렇게 살다 죽었다.

하지만 유독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아프게, 숨막히게 목구멍에 죄여드는 생이 있다.
끔찍한 백 스물 두번째 생에서, 나는 내가 사랑한 사람에게 마녀로 밀고당해 화형당했다. 바닷물만 닿으면 변하는 몸뚱이가 문제였다.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사제들의 주장으로는 인어는 영혼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나는 결코 천국의 문을 넘을 수 없고 구원받지도 못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지금 흘리고 있는 눈물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이 생생한 눈물은. 나는 한참을 울다가 마침내 그치고 훌쩍거린다.
눈물방울이 떨어진 손등은 얼룩진 핏자국으로 엉망이다. 내 피가 아니다. 그녀의 피다.
안데르센 동화속의 인어공주는 사랑에 배신당했다. 그리고 왕자를 죽이는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왜 그런 바보같은 선택을 했을까?
바닷물이 이렇게 차가운데?
마치 나를 놀리듯 포말이 무릎 바로 앞까지 밀려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간다.
시간이 의미없는 중얼거림과 허무한 변명들로 가득찬다.
고백하던 사람이 거절의 말을 듣고 갑자기 사라진 경험이 있는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생각하겠지.
그 사람이 울면서 집에 가고있거나, 술집 화장실에서 울고있을것 같지?
아니? 걘 이미 죽었어. 나야.
인어는 사랑을 얻지못하면 죽는다.
낭만적이라고? 전혀.
갑자기 이 세상에서 내 존재가 사라지는것은 행복한 느낌이 아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만난 두 사람이 똑같은 온도로 서로를 동시에 사랑하는 일은 바다에 빠진 반쪽짜리 진주를 찾는것만큼 힘든일이다.
사랑은 그 이름 자체로 이미 기적이다.

나는 너를 잃고, 수많은 당신을 잃고. 죽었다.
다시 만나게될 그대가 나를 사랑해주길 기도하며.
이다지도 무자비한 그대가 나를 사랑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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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멋진 신발을 손에 얻었다. 기쁨이 한껏 솟아나서, 나는 웃음을 잔뜩 머금고 자랑을 해댔다. 희망을 잔뜩 심어놓은 듯 흰 신발이 참 마음에도 들었다. 그래서 웃었고, 그래서 자랑질을 해대었다.
내 신발이 남의 신발굽에 묻는게 싫었다. 꺼매지잖아. 흰 신발에 꺼먼 것이 묻으면, 더러워지니 그것이 참 싫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싫어해도 되는걸까, 물론 싫어하긴 한다. 아직도. 무얼 하던지 새하얀 종이에 거뭇한 잉크가 묻으면 싫으니. 글을 싸질러도 오타가 비스무리, 비문들도 잔뜩 섞여 엉망이 된 내 옛 글이 마음에 글지 않으니.
무얼 어떡하겠는가 싶다. 그냥 입을 막고, 입을 닫고, 행복을 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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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금붕어

* 다소 혐오스러울 수 있는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I에게는 심각한 허언증이 있다. 아니, 조현병인가. 잘은 몰라도 분명 제정신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언젠가 점심 먹으러 가는 복도에서 I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무 배고프다. 어제부터 한 끼도 못 먹었어.
 주위의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양 낯빛을 어둡게 꾸미고 한마디씩 물었다. 왜, 다이어트해? 어디 아팠어?
 아니, 어제저녁에 금붕어를 토했거든. 나 초등학생 때부터 뱃속에 넣어 기르던 건데. 너무 슬퍼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
 그 애는 똑똑하고 사교적이고 멀쩡해 보였지만, 가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툭툭 뱉었다. 비위가 약하면서도 지나치게 상상력이 좋았던 나는 덕분에 점심을 걸렀다. 이러다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아. 두통에 시달리던 이들은 구석에 모여서 한마디씩 뒷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다음날 해가 뜨면 모두 마법처럼 활짝 핀 얼굴이 되어 I의 곁을 맴돌았다. I는 이사장의 딸이니까. 곁에 있으면 콩고물이 고소할 정도로 떨어졌으니까. 그곳은 학부모에게 넌지시 촌지를 요구하고, 상납하지 않은 아이는 선생이 나서서 왕따를 주도할 만큼 썩은 물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I가 옆에 있는 것만이 삶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굴었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끝내고 2학년을 앞두었을 즈음, I와 나는 더 가까워졌다. I는 나를 과외에 넣어주고 항상 곁에 두었으며 그가 받는 많은 혜택을 나에게 나누어 주었다. I 주위를 맴돌던 다른 애들과 나의 차이가 뭐였을까? 글쎄, 강한 인내심? 아무튼 걔는 나를 인생의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나에게 I는 약간 맛이 간 돈 많은 여자애,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I의 어머니가 주도한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 겨울 방학을 보낸 뒤 2학년이 되었다. 그해의 공기는 작년보다 더 신선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와 친해지면 I에게도 줄이 닿을 것이라 생각한 많은 애들이 나의 충직한 친구를 자청해왔다. 선생들은 I를 대하듯 자연스레 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성적은 거의 꼭대기를 찍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이었다. 가끔 I때문에 점심을 걸러도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다. 나빴다. 점점 나빠졌다. 공기는 달콤함을 잃었다. I와 나는 비밀이라던가 가정사 같은 것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정확히는 I 혼자 그렇게 생각했고, 목소리를 낮추고 나에게만 해 주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의 횟수가 늘어났다.
 나 사실 동생이 있었는데.
 응.
 어렸을 때 기차에 치여서 죽었거든.
 …….
 너무 순식간이라 막을 새도 없었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철로에 시체가… 아니 파편이, 막… 여기저기….
 하필 점심을 먹고 난 이후였다. 나는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욕지기가 솟는 입을 틀어막는 게 더 급했다.
 그때 나는 꼬맹이라 핸드폰도 뭣도 없고, 엄마 아빠 몰래 나온 거라 우리 둘뿐이었는데. 오래된 역이라 사람도 없었어. 나는 개구멍으로 몰래 드나들던 내내 거기가 폐쇄된 역인 줄 알았거든. 열차가 다니는 줄은 몰랐단 말야. 아무튼 울다가 어디서 라면 박스를 주워 와서 그걸 담았어. 손이랑 옷이며 신발이 벌겋게 엉망이 되고… 반쯤 담았나. 마침 순찰하던 역무원이 나를 보고 급하게 위로 데려왔어.

 으……
 …그래서 나는 혼자 남았어. 끝.
 웩. 결국 속에 있는 걸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교실에 있던 이들이 요란스레 소리치며 물러났다. 항상 허무맹랑했던 만큼 이 얘기도 구멍투성이였다. 너 내내 서울에 살았다며. 서울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며. 네가 몇 살이나 살았다고 동네에 개구멍까지 뚫린 오래된 역이 있어? 사람이 치였는데 네가 박스를 구해서 시신을 줍는 동안 상황을 수습하는 사람이 정말 한 명도 없었어? 진짜 있었던 일이 맞기는 해? 네가 말한 비밀 중에 제대로 된 얘기는 하나도 없었잖아. 증명해, 제발 증명해. 나는 책장이 아니야. 네 역겨운 거짓말이 벌써 내 머리에 수백 개는 꽂혀있어. 얘기는 빌어먹게도 잘 지어서. 길 가다가 생각나고 웃다가도 생각이 나서, 구역질이 나서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야!
……라고 나는 소리치지 못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나를 피해 교실 벽까지 멀어졌다. 정면에는 건조하게 나를 방관하는 I의 동그란 눈동자가. 이 난리는 선생님이 달려와 교실을 수습하고 나는 조퇴하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되었다.
 이후 I와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서로를 먼저 찾지 않았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미묘한 어색함이 떠돌았다. 나는 곧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 I는 여전히 수많은 이에게 둘러싸여 있다. 나는 아직 반절이나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모르는 채로 부적응자처럼 교실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기쁘게 전학을 가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