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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는 항상 억압되어야 했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차별되어야 했다.

왜일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말이다.

'나'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타인의 시점에서 '너'이기 때문이었을까.


저도 지금 제가 무슨 글을 쓴건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자신의 시점에서 '너'는 그 당사자의 시점에서 '나'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고 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지 말아달라는 뜻이에요. 제가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좋은 꿈 꾸세요:)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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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멋져 보이네 ?
멋진 나야.
오늘은 슬퍼보이네?
슬픈 나야.
나는 맨날변하네?
변덕쟁이야.
이토록 아름다운 오묘한 모든것은 나에대해 나는 만족해.
왜? "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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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고장난기계처럼조각난문장만을내뱉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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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나도 괜찮다고 말하곤 했다
스스로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쩌면 신뢰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포장하여, 
타인에게 비밀을 밝히라고 암묵적인 강요를 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나를 알리는 것이 나의 약점이 될까봐.
'타인을 믿지 못해 나를 감춰버렸거나 혼자 겁을 먹고 적극적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겠지'
생각을 결단지으면서 다른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깨달았다
결국,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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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

완벽함이란 뭘까. 완벽함의 기준은? 그 기준은 누구에게서 만들어진 것일까. 나에게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타인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거겠지. 그걸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건 참...... 어떤 기분일지 대충 짐작은 간다. 내가 완벽하고자 애썼던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더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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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사람

내 일이 아니면 뭐든 관심이 없지. 내맘대로 해결이 안되면 그날은 기분이 좀 별로야. 내 마음을 채우는 건 오직 내 관심사 뿐. 타인의 일을 도와주려면 나는 마음의 준비를 늘상 해야하지. 원래 그랬던건지 아니었던건지는 이제와서 잘 모르겠어. 유전이 이렇게 만든건지, 혹은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말이야.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하는 시덥지않은 농담을 할 때, 나는 대답하고 받아치는 것만 잘하지. 먼저 건내는 건 잘 못해. 타인이 뭘 하든 관심이 없으니까.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도 먼저 연락하지 않아. 나는 개인주의자니까. 하지만 그대로 살거면 왜 인간으로 태어나 사는건지 의미 없어 보여. 매번 이런 나를 고쳐야 한다고 하지만, 피곤할때면 돌아와있고 나는 또 친하게 지내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외로운 사람이길 자초하는 것 같아 이런 내가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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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고독한 군중.
이렇게 모순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주변에 사람은 넘쳐나지만 그들과 깊은 교류는 불가능하다. 불신이 내리박힌 사고의 뿌리는 이내 모든 것에 무관심을 더한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줄 이유도 없으며, 내 일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은 곧 껍질로서 경화해 몸의 일부분이 된다. 눈에도 베일을 걸어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허나 우리 모두는 마음 속 깊이 인정받고, 더해지고, 인지되고 싶은 욕구를 감추고 있다. 조금만 더 솔직해진다면 우리는 껍질을 깨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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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내가 힘들다고, 타인의 불행을 보며, 위로 받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하고 반인륜적이라고. 
차라리, 무작정 힘들어 하자, 솔직하게 말이다 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고난을, 나의 떡밥으로 쓸 수는 없다' 는 입장은 
일종의 자존심이자, 원칙이고 고집이었다.

그러다가,  Buddha 가 그에 대한 supporting statement 를 남긴 것을 보고, 
그래, 내가 맞구나, 맞아.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몇 번을 바닥을 치고, 
별 자존심도 고집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즈음,  
세상에는 나 보다 더 힘든 生의 조건에 주어진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어떻게, 불가항력적으로 그렇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은 "매우" 아프다. 
내 이야기를 꺼내놓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렇게 "매우" 힘든 인생을 거쳐왔단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대화 하는 내내, 
"대단하시네요..." 라는 말만 연속적으로 반복할 뿐이었다. 
그들은, 하버드를 나온 것도 아니고, 대통령 보좌관도 아니고, 어떤 정책을 내놓은 것도 아니고, 
적군을 물리친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 말 밖에 달 리 할 말이 없었다. 
반성의 의미로,

군소리 말고, 열심히 살자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쿨하다' 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성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많은 혜택을 받았다. 
나 보다 더 많이 받은 놈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전쟁 때문에,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70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할머님들의 염원까지 모두 살아내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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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늦은 봄, 친구 한태와 함께 지리산 종주를 갔다. 한태한테 늦은 술자리에서 우리 심심한데 지리산 종주나 갈까라고 물었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해서 시작된 종주였다. 
그 전에도 수차례 종주를 한 터라 별 준비 없이 물통 하나씩 챙기고 김밥 두세트 사서 늦은 6시에 장터목을 향해 출발했다.
젊은 치기에 처음 산행에도 불구하고 한태는 앞장서길 자청하였고, 어려운 산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던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그게 모험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한참을 올라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너바나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사, 사람길이 아니었다. 멧돼지 따위의 산짐승이나 산에 미친 사람들이 다니는 아주 희미한 길의 흔적만 남은 곳을 걷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너무 많이 와서 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산에서 이런식으로 길을 잃었다면 반드시 위를 향해 가야한다. 전체 산세를 읽고, 목적지를 정확하게 정할 수 있는 뷰 포인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짐을 뒤져서 남은 식량과 물, 기타 도구를 체크하였다. 
물 1리터, 김밥 2줄, 스팸 2통, 쌀 400그램, 휴대용 버너와 기타 도구들.
일단 이정도면 버틸만하다고 판단하고, 겁에 살짝 질린채 허세가득한 목소리로 내려가자고 떼를 쓰는 한태한테 우린 올라가야 한다고 설득하여, 야간 조난 모험을 시작하였다.
그 시간이 대략 22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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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벗기

 마침 오늘 읽은 책(아쉽게도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의 내용과 주제가 어느정도 상응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서 가면벗기라는 제목으로 짧고 서툰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나는 글쓰기에 있어서는 어마어마한 아마추어이기때문에 이 글이 어떤 식으로 끝맺어질지,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나조차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무엇일까? 나는 그 중의 하나가 어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현대인의 고민거리만은 아니겠지만. 사실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한 것은 아니다. 고민의 시작은 무기력함과 내 삶에 대한 미약한 의지였다. 책을 통해 발견한 무기력함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 스스로가 나를 알지 못하고, 사회에서 정해준 역할에만 충실할 뿐—사실 그마저도 장담 할 수는 없다.—내가 무엇을 향해 가는 중인지, 심지어는 나의 감정이 어떻고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진짜'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SNS나 기타 검색망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말은 꽤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타인을 대상으로 한 진술이다. 풀어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대할때 스스로의 감정은 뒤로한 채 가짜 웃음을 짓거나, 가짜 슬픔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는 타인을 향해서만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타인보다도 어쩌면 '우리 자신'을 향해서 더욱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이 타인을 향한 가면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타인을 향한 가면은 (가면이었다는 것이 탄로나지 않는 한) 오히려 나에게도 결과론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나를 향한 가면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두꺼워져서 나 조차도 나를 알 수 없게 만들어 버려서 '나'라는 하나의 특별한 정체성을 지닌 인간을 사회로부터 지워버리고 '사회, 혹은 공동체'라는 명목에 흡수되게 하기때문이다. 이 말이 다소 복잡하다면 본인의 실제 생활경험을 돌이켜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것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과연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는지, 사회가 나라는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 성별, 나이 등에 부여하는 기준에 의해 그것들을 좋아하게 된 건지 의문이 들 것이다. 
  가면을 벗어야 한다. 가면을 벗고 그 안의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말이 쉽다. 사실 가면을 벗는 것은 개인의 인생에서 어쩌면 최대 과제일만큼—적어도 내 생각에는—어렵다. 하지만 가면을 벗은 대가는 상당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물론 사람과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사회에서 타인의 시선 없이 모든 사람들이 '(실재하는 지에 대해 아직까지도 철학자,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중인)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행복을 충실하게 이룩해 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유토피아일 것이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아마 이러한 유토피아가 도래하기 전에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인류가 멸종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가면를 벗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나 자신을 향해 쓰고 있는 가면을 말이다. 소위 말해 가면을 벗는 꿀팁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가면을 벗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내가 가면을 쓰고 나의 감정을 비롯해서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면벗기의 첫 걸음이라는것이다. 
미숙하고 명확하지 않은 아마추어의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첫 글인데 어떻게 읽으셨을지 모르겠네요. 감상평이나 의견은 환영합니다. 단, 저는 글쓰는 사람도, 철학자도 아니라는 점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책의 내용이 철학적이다보니 글이 다소 철학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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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랑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무엇이 간질이는 마음인지, 무엇이 설레는 상상인지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남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못했다.
모두가 그 아이를 둔하고 눈치 없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을 모르면 너는 살아갈 수가 없다"
"왜요?"
"사랑이 인간의 원동력이기 때문이지"
이해되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말이었다
아이는 사랑이 인간의 원동력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하는 입바른 말로 치부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사랑이 얼마나 가까이있고 보기 쉬운 감정인지 알기에 완벽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
"사랑은 그저 감정일뿐이잖아요. 인간은 감정을 원동력으로 삼아 원동력에 휘둘리고 죽나요?"
그래서 수많은 질문을 했다. 사랑에 대하여
'왜'라는 작은 궁금증이 채워질때까지 타인에게 혹은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
"시끄러워, 어른이 그러면 그런줄 알아야지"
"요즘 애들은 하나같이 감수성이 없어 그렇게 살다 혼자 쓸쓸하게 산다"
"그럼 너는 사랑없이 태어났고 사랑 받지 않고 살았어? 복에 겨운줄도 모르고 떠들어대긴"
물론 아이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이에 물음에 답변이 아닌 질책을 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누구도 이 아이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정의를 무시했다.
마치 그것을 신성한 하나의 신을 보듯, 그것을 매도한 아이는 이단자일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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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쑥 불쑥 나타나지 좀 마. 
너 때문에 안경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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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VK) 양아치 새끼와 연애란 ep 00

원본 출처 - 비믕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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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형과는 1학년 때 처음 만났고, 쫌 뚱딴지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닌다던가, 복장도 불량스러웠으며, 꼭 민윤기와 붙어 다녔다. 그러니까, 김태형과는 처음부터 친하지 않았으며 석진이는 필사적으로 김태형과 가까워지기를 꺼려했다. 내가 김태형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게 된 건, 고작 일년하고도 반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야! 전정국!!"
"왜 왜 뭐! 오늘은 절대 버스비 못 내줘!"
"지랄을 하세요. 누가 내달래?"
"아 미안 설레발 쳐서"
  항상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일년하고도 반개월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는 공식
"얘가 낼 거예요"
"아 뭐...! 아, 학생 두명이요"
"짜식이 낼 거면서 튕겨"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친구니까, 친구라서 내는 거다. 어떻게 내가 매정하지 못하는 것을. 그것을 김태형은 잘 이용해 먹었다. 거기에 나는 매번 속고 당하는 쪽이고. 치밀하지 못한 김태형한테 맨날 엮여서 억울한 눈으로 노려봐도 김태형은 꿈쩍이지 않았다. 탕탕- 당당하게 맨 뒷좌석 옆자리를 친다. 그래도 김태형만 이득 보는 건 아니다. 녀석 때문에 더럽게 꽉 막힌 버스에서 앉아 학교까지 편하게 간다는 건 나또한 손해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부럽냐? 부러우면 지는 거란다. 남몰래 피식 피식 입꼬리를 들썩이는 내 어깨에 툭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기대온 김태형이었다.
"너도 자지 마라. 저번처럼 조따 뛰고 싶지 않으면"
"아아 불편해!! 대체 든 것도 없는 머리는 왜 때문에 무겁니"
  내가 투덜거리던 말던 눈을 감고 잠을 잔다. 역시 전정국 어깨가 세상에서 제일 푹신해서 잠이 잘 온단 말이지. 쪼르르 딸려오던 여러개의 시선은 김태형 손짓 한방에 떨어진지 오래다. 언제나 창가 구석으로 나를 몰아넣고, 내 어깨를 말없이 빌리는 이 자식과 나의 관계는 친구다. 평범하게 그게 끝이다. 누가 보아도 김태형과 나는 친구 한정이다.
  솔직히 말 못하는 속사정이라면, 이쯤에서 시선을 창가에 두었다.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김태형도 남자고, 나도 같은 생식기가 달린 남자로서 불공평하게 나혼자 이 녀석을 좋아하고 있다. 그저 이 자식은 나를 편리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이렇게 가까이서 붙어 있는 게 나름대로 만족도는 높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