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메뉴
Blank <Jesse Echevarria / Unsplash>

당신을 죽여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맨손을 내밀었다.

태고적 부터 손에 무기가 없음을 피력하는 무장해제의 제스처를 취하며, 그 사람은 다시 말했다.
"당신을 죽여드리겠습니다."
맨손으로? 맨입으로? 두 가지중 어떤걸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고통스럽진 않나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는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는다. 이미 절실히 죽고싶었기 때문에.
자살자의 마지막 소망으로, 나는 연탄을 태워 유독가스에 질식사 하고싶지 않았다. 나는 독약을 마시고 위장이 녹는 고통을 느끼며 죽고싶지 않았다. 나는 목을 매달고 죽고싶지도 않았다. 필요한 준비물이 튼튼한 밧줄과 튼튼한 서까래였지만, 원룸 월세방에선 요원한 일이다.
목 마른자가 우물을 판다고. 문 손잡이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고통스럽고 지난한 죽음을 피하려는 내가, 숨이 막혀 죽을때까지 목에 스타킹을 감고 있을것같진 않았다.
달리는 전철앞에 뛰어내리기? 출퇴근 시간을 피한다고 해도 다른사람들에게 민폐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기? 요즘 고층건물들은 옥상문이 다 잠겨있더라. 땅값 떨어진다고 무정하게 말할 후안무치들은 또 어떻고.
이렇고 저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앞에 날 죽여주겠다는 사람이 떡하니 나타난건 내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행운이었다.
"정말로요?"
고개를 끄덕인다.
"대가는 필요없나요?"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 잘됬다. 하지만 믿기지 않을정도로 너무, 너무 좋은 조건이지 않은가?
"당신이 사기꾼처럼 보이진 않지만요. 솔직히 좀 믿기 힘드네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가 사람이었는지 귀신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얼굴이었지? 무슨 옷을 입고있었지? 나이는? 성별은? 흑인이었나? 목소리는 어땠지? 젊던가? 아니면 눈가와 입가가 오간자 치마처럼 주름이 져있었던가? 추했나? 아름다웠나?
기억나는것은.
그 사람은 입이 찢어지게 미소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당신을 죽여드리겠습니다."
뭐, 사실 그거면 충분했다.

다른 글들
2 0

공허함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오히려 내 마음은 이따금 공허해진다. 당신이 내게 너무나 큰 존재라서 그만큼 큰 공허함이 날 집어삼킨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나 나를 보는 당신을 볼 때, 저 멀리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밀려 들어 날 잠식시킨다.
 이전에는 이랬지,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러니. 하는 말이 무서워 처음부터 다 내주지 않으려 한다는 당신이 현실적이라서 당신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라 그 기분을 느끼는 내게 자괴감이 든다.
 관계를 가지면 늘 물을 떠다주던 당신이 먼저 씻고 오라며 나를 보내던 날. 늘 나랑 누워있으면 하고 싶다고 목에 키스하던 당신이 오늘은 그냥 자고 싶다며 그렇게 웃으며 말하던 날. 하루하루 싸우는 게 늘더니 이제 내 앞에서 웃는 횟수가 줄어드는 게 보이던 날.
 그 하루하루가 날 집어 삼켜 앞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커지진 않았어도 작아진 것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늘도 잠에 든다. 지쳐서 쓰러지지 말라며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또 일으켜 세우는 것을 반복한다. 힘들지 않다, 당신은 내 전부이기에.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고개를 들 듯, 나도 당신을 향해 든 고개를 내리지 않으니. 힘들 수 없다. 당신이 내 마지막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그리는 미래에 당신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1 0

돌아오는 봄
사람들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계절
기다리는 이
없는 줄도 모르고
저마다 화사하게
옷을 갖춰입고
고개를 내민다
아무렇지 않은 듯
무감각하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새벽
한껏 몸을 웅크린
꽃 위로
눈물이 맺힌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툭 떨어지는 눈물
따뜻한 기운이 
땅을 뒤덮는 낯
다시 어제보다 더 
꼿꼿이 고개를 든다
다 괜찮다는 듯
3 3
Square

마무리

흐린하늘에서 한두방울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억수같이 비를 퍼부었다. 당연하게도 가방안에는 우산이 없었다. 온몸이 아플정도로 내리는 장대비였다. 비를 피할만한 곳으로 가거나 우산을 사야했지만 그냥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싶었다.
기어이 당신을 밀어내고 오는 길이였다.
그럴 이유가 충분했다.
비에 쫄딱 젖은 청승맞은 모습으로 터덜터덜 인도를 걸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실성했거나 실연당한 여자로 보일게 분명했다. 연인에게 무정한 말들을 쏟아내고 결별을 선언한 여자로 보이진 않을거다. 독하도록 멀쩡한 모습으로 오늘 하루를 끝내고 싶었는데, 기상청 예보라는 의외의 변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세금도둑놈들.
나는 완벽하게 끝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그 이후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같은 끝맺음은 어쩐지 의심스럽고 비현실적이다. 슬리핑뷰티와 왕자님도 백년의 세대차이와 정치적 견해로 언성을 제법 높였을 것이다.
나는 온전한 끝을 바란다.
이를테면 마왕을 물리친 용사가 왕국으로 돌아와 공주와 결혼하고, 몇십년후 장성한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말이다. 하지만 용사의 경우 불치병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건강하고, 행복했고, 공주와 결혼해서 잘 살다가 정정한 모습으로 늙어갔을것이다.
나에겐 늙을기회가 없다. 나는, 이제 얼마 못산다.
나는 끝을 바란다.
병들어서 누워있는 내 곁에서 내 불행에 가슴 아파할 가족이나 연인은 필요없다. 동정이 싫어서가 아니다. 내 아픔에 더 큰 아픔을 느낄 그들을 보는게 괴롭다. 두렵다.
고고하게 혼자 죽을생각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그렇게도 볼 수 있을것이다. 곁에 아무도 없이, 쓸쓸하고 외롭게.
정말 그게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내가 뭐가 좋아서 혼자 거울을 보며 이별연습을 했을까. 사랑해서 떠나보낸다는 말은 다 개소리다. 이건 그냥 내 이기심에서 비롯된거다. 당신이 내 병든 모습을 보고 슬퍼하는걸 보고싶지않다.
그래, 이건 그냥 전부 내 욕심이다. 내 탓이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다. 드라마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건 이 세상에 없다. 어느집이나 적당히 불행하고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가 끝날때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서 행복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은 나에게 구역질 이외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이 싫은게 아니다. 단지 조금 작위적이라 역겨울뿐이지.
그러니 아까부터 내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미친여자를 구경하려는 사람이거나 범죄자거나 조금 동정심이 넘치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일리가 없다.
"청승맞게 뭐하는거야?"
당신이여선 안된다.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
나는 무시한다.
"무시하지 말고."
"누구시죠?"
당신이 피실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모르는 사람인척한다 이거지?"
"그런척이 아니라 사실이거든요?"
"아닌데."
"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 아니거든요?"
"그럼 어떻게 되는건데?"
"완전 타인이라구요. 완전 생면부지의 타인."
"아, 정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당신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 손 놓으시죠. 성추행범으로 경찰서에 신고하기전에."
"나 좀 봐."
"손 놓으라고."
"알았어. 그럼 도망가지도 말고 헤어지자고 하지도 말자."
나는 당신을 돌아본다. 의아하게도 당신은 울고 있었다. 목소리에선 한점의 떨림도 없었는데 처량한 두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헤어졌어."
내 말을 듣고있는 당신의 눈썹이 느른하게 풀려있는게 보이지만 나는 안다. 당신이 괴로워 하고 있다는걸 안다.
"알아."
"난 도망가지도 않았고."
"알아. 그것도."
"그런데 왜 따라온거야?"
"나도 몰라."
당신은 고개를 숙인채 계속 내손을 붙잡고있다. 나도 당신의 손을 마주 잡고있다.
"나도 모르겠어."
"나쁜사람이 되고싶지않아."
내 목소리에 당신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말했지. 나 이제 오래 못산다고."
"들었어."
"그리고 말했잖아. 나중되서 후회하지말고, 날 원망하지도 말게 우리 그만 하자고."
"응."
"그냥 적당히 끝내고 서로 갈길 가자고."
당신이 돌연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래, 나는 이쪽으로 가고싶어."
미친새끼. 생리적인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돌았구나."
"널 따라가는게 아니라. 그냥 이쪽길로 같이 가고싶은거야."
"완전 미친놈."
"그러다 네가 잠시 쉬게되면, 나는 다른 예쁜여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을꺼야."
"개새끼야!!!"
내 주먹질을 맞으면서도 당신은 태연히 말한다.
"자식들이 손자, 손녀 낳고 내가 나이먹고 늙으면. 그럼 우린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되잖아."
"또라이새끼!"
당신은 발버둥치는 나를 껴안는다. 나는 당신의 정강이를 향해 발길질하다가 멈춘다.
"그러니까, 조금만. 응?"
"......"
"조금만 같이 있자 우리."
당신이 울고있다. 이제는 구태여 울음소리를 참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입을 다물고 당신을 마주 껴안는다. 나는 당신의 젖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우린 행복하지 못할거야."
"응, 그래도 괜찮아."
당신은 날 껴안은채 계속 괜찮을거라 말했다.
모두 다 괜찮을거라고.
1 0
Square

짙은

"당신은 만날때마다 검정이네요."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늘어진 머리칼과 검정색 셔츠, 검정색 가디건과 검정색 면바지의 남자는 한쪽손에 벗어든 검정색 신발을 쥐고 있었다.
남자의 하얀 발 아래로 파도가 넘실거리는것이 보였다.
"안 추워요?"
허리까지 물에 잠긴 내가 할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나는 얼음장같은 바닷물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다. 나는 깊게 숨쉬려 노력했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냉기에 제대로 움직일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 모든일에 자신은 관계없다는듯이, 너무나 태연하게.
"안 추,워요?"
떨리는 턱에 힘을 주며 다시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내 입가가 희미하게 미소짓는것이 느껴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자가 대답해주는건.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변덕을 부리고 있는 것 일까.
"추운데, 왜 여기있어요?"
울고있던 내 얼굴로 남자가 시선을 던졌다.
"나 때문에요?"
남자는 침묵했다.
"날 보러온거에요?"
재차묻자 긍정하듯 남자가 얕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요? 내가 어떻게 뒈지나 보고, 보고싶어서, 왔어요?"
나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두팔로 내 몸을 힘껏 껴안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추워서 참을수가 없었다. 두 손과 두 팔이 가슴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도록 나는 품에 나를 묻었다.
"네깟게 어디까지 버티나, 얼마나 괴로워 해야. 고통받아야, 제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궁리하다가. 이제, 죽을테니까. 어떻게 죽나, 궁금해서 찼아왔어요? 부모도 죽고, 형제도 죽고, 친척도 죽고, 친구도 죽고,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자살하나,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찼아온거에요?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요?"
나는 정신나간 여자처럼 중얼거리며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요, 궁금했어요. 왜 내곁에 누군가 죽을때마다 당신이 나타나는지 궁금했어요. 당신은 저승사자에요? 천사같은거에요?"
남자의 하얀발은 미동도없이 그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고해성사 하듯 고개를 숙이고 그 발을 바라봤다.
"이런게, 저승사자면 천사면.
지옥에 떨어져도 필요없어요, 나는."
부모님이 눈앞에서 돌아가시던 8살때부터 내앞에 나타난 남자는 한번도 내 물음에 입을 열어 대답한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묻고야 말았다.
"왜, 나한테 죽어버리라고 말 안해요? 왜 계속 날 구해줘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거기 있는건 서리 내린 들판처럼 차고 시린 눈이었다.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남자는 짙은 눈으로 날 내려다 봤다.
"그래야."
대답없던 자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나는 숨쉬는것마저 잊고 홀린듯 그 입술을 바라봤다.
몸을 굽힌 남자가 바다속에서 내몸을 끌어올렸다. 출렁이는 파도가 떠나지 말라며 내 젖은 옷깃을 끌어당겼다.
차가운 귓가로 남자가 속삭였다. 나는 겁에 질려서, 안도감에, 예상했던 대답에.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야말았다.
남자가 말했다.
"그래야. 고통이 계속 되니까."
0 0

버스

버스를 타지마세요.
만약당신이 임산부라면요.
끊어질듯한 허리와 욱신거리는 무릎
커다란 배를 움켜쥐고 힘들게 서있어도
아무도 당신이 임산부라는걸 몰라요.
고개숙인 죄인들뿐이거든요.
버스를 타지마세요.
만약 당신이 노인이라면요.
희끗희끗한 머리와 한손에는 지팡이
무건운 짐을 컬터메고 힘겹게 서있어도
아무도 당신이 노인이라는걸 몰라요.
수면마취중인 잠꾸러기들 뿐이거든요.
5 1

꺾어가도 괜찮아요

마음이 자랐다
물은 준 적이 없는데
아니, 지난밤
눈을 감고 떠올린 것은 어쩌면
밤의 도화지에 그린 이름은 어쩌면
이것은 당신 것이다
정해 놓고는 가져가지 않을 것도 알았지
그래도 이것은 너의 것
언젠가 흘리던 눈물을 사랑해요
비가 되어 내리면 나는 젖고 싶어
잎사귀엔 당신이 맺히고
햇살 같은 웃음을 사랑해요
나는 무럭무럭 자라나 그늘이 되고 싶어
손을 뻗어 너의 머리를 가리고
땅의 생기와 해의 신비함은 어쩌면 사랑
어쩌다 날아온 씨앗에
준비한 땅을 모두 내어 주는 것
뜨거워지면 나는 몸을 바로 하고
꽃은 여기에 있어요. 고개를 흔들고는
꺾어가도 괜찮아요. 써 놓은
글자는 내가 준비해 둔 것
1 1

강박증

나는 착한사람 이여야 한다는
나는 좋은사람 이여야 한다는
끝도 없는 강박증
사소한 것도 
내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깍아내려왔다
그만할까 싶어서 
독하게 마음먹고 
고개돌리고 외면하려 했지만
이미 마음은 요동쳐서
가만히 있질 않는
이런 내가 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이란건 감출 수 없는 것
강박증인줄만 알았는데
어느순간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0 0
Square

인어

아아...왜, 당신은, 이다지도. 이다지도.

햇빛을 받은 바다가 금빛 비늘처럼 반짝이는것이 보인다. 몇 천개의 빛나는 눈들이 눈꺼플을 깜박인다. 
나는 그 위로 고개를 들어 올린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태양은 온화한 빛을 내뿜는다. 너무나 멀고, 너무나 따스해보인다.
하지만 정작 내가 있는곳은 춥고 외롭다.
나는 벼랑 아래 그늘진 모래톱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고요한 냉기가 무릎을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따가운 모래가 들러붙는다. 조금의 온기라도 가지고 싶어서 두손을 허벅지에 대고 문지른다.
그러다가 울컥 눈물을 흘린다.
대체 몇번의 밤이 지나야 하는걸까. 몇십번의 상실이 있어야 하는걸까. 몇백번의 죽음을 겪어야 하는걸까.
나는 여인으로도 사내로도 살아봤다. 그렇게 살다 죽었다.

하지만 유독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아프게, 숨막히게 목구멍에 죄여드는 생이 있다.
끔찍한 백 스물 두번째 생에서, 나는 내가 사랑한 사람에게 마녀로 밀고당해 화형당했다. 바닷물만 닿으면 변하는 몸뚱이가 문제였다.
...이제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
사제들의 주장으로는 인어는 영혼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나는 결코 천국의 문을 넘을 수 없고 구원받지도 못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지금 흘리고 있는 눈물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이 생생한 눈물은. 나는 한참을 울다가 마침내 그치고 훌쩍거린다.
눈물방울이 떨어진 손등은 얼룩진 핏자국으로 엉망이다. 내 피가 아니다. 그녀의 피다.
안데르센 동화속의 인어공주는 사랑에 배신당했다. 그리고 왕자를 죽이는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왜 그런 바보같은 선택을 했을까?
바닷물이 이렇게 차가운데?
마치 나를 놀리듯 포말이 무릎 바로 앞까지 밀려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간다.
시간이 의미없는 중얼거림과 허무한 변명들로 가득찬다.
고백하던 사람이 거절의 말을 듣고 갑자기 사라진 경험이 있는가.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생각하겠지.
그 사람이 울면서 집에 가고있거나, 술집 화장실에서 울고있을것 같지?
아니? 걘 이미 죽었어. 나야.
인어는 사랑을 얻지못하면 죽는다.
낭만적이라고? 전혀.
갑자기 이 세상에서 내 존재가 사라지는것은 행복한 느낌이 아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만난 두 사람이 똑같은 온도로 서로를 동시에 사랑하는 일은 바다에 빠진 반쪽짜리 진주를 찾는것만큼 힘든일이다.
사랑은 그 이름 자체로 이미 기적이다.

나는 너를 잃고, 수많은 당신을 잃고. 죽었다.
다시 만나게될 그대가 나를 사랑해주길 기도하며.
이다지도 무자비한 그대가 나를 사랑해주길.
0 0

츠카레오인지 레오츠카인지

 "스오, 언젠가 그렇게 말 했었지?"
 "예?"
 "나한테 말이야. 'Leader는 약하지 않아요, 아직은 용기가 부족할 뿐이죠!'라고 했었던가?"
 레오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마냥 장난스럽지만은 않으며, 그렇게 격식차린 것도 아닌 듯한, 필히 유닛 막내를 대할 때 리더의 미소. 평소 레오의 행실을 따져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 이럴 때만 그런 표정을……. 
"……뭐어, 맞긴 맞습니다만. 갑자기 왜요?"
 "아니아니, 그냥 생각나서. 나, 이제… 졸업이잖아. 추억팔이?"
 레오가 손에 든 덴파레 꽃다발을 들어보였다. 부시럭, 하고 꽤 큰 비닐 소리가 나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꽤 소리 크네, 이거.
 "……그런 거, 팔아봤자 살 사람도 없잖아요."
 "그냥 해본 말이지. 스오가 사 줄래? 영원히 잊지 말기로 약속하자. 우리가 'Knights'였을 때의 추억. 세나도, 나루도, 릿츠도…… 잊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졸업하기 전까지만이라도 기억하고 있어 줘."
 "뭐… 리츠 선배나 나루카미 선배 마저 졸업과 마주하게 된다면, 'Knights'는 제가 책임져야하긴 하지만요. 졸업 후에도 이 지긋지긋한 학교 생활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츠카사가 제 두 손을 깍지 껴 잡아 고개를 떨구며 슬프게 웃어보였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보다는, 괴롭지만 즐거웠던 기억이 더 많았는데.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손가락으로 헤아려보았다. 열 손가락으로 전부 헤아려질리는 없었지만.
 "나 때문에… 힘든 기간도 많았잖아. 책임감도 없이, 내가… 기사들의 왕이, 패하는 게 무서워서 도망쳤었어. 그렇게 긴 시간동안……."
"이미 지난 일이니까요. 더군다나… 그 후부터 지금까지는 잘 해 왔잖습니까? 저희들의 'Knights', 다시는 패할 일 없도록 저와 나루카미 선배, 리츠 선배가 잘 이끌어나갈테니까요. 그러니까…"
츠카사가 말을 하다 말고 약하게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결국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입술을 짓씹었다.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리더, 츠키나가 레오의 졸업. 실감도 나지 않았고, 사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너희들, 벌써 일 년을 같이 보냈어. 라고 하면, 믿기지도 않을 만큼 짧은 기간이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내 Knights는… 여태까지 내 손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는걸. 하지만 이제는…
 굳이 안 그래도 될 것 같네. 이렇게 믿음직한 막내가 있으니 말이야."
 레오는 전처럼 해맑게 웃으며 츠카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츠카사는 고개를 들어 레오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많이 무서웠어.
 내 Knights를 위에서 끌어내린 것도, 이미 끌어내려질대로 끌어내려진 나의 기사들을 더욱 괴롭고 고단하게 한 것도 나인데. 또 그런 실수를 해서 너희들을 실망 시킬까봐."
 레오는 제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츠카사가 그런 레오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차마 위로할 수도 없고, 되려 욕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 
 "이젠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습니까, 제가 선배들과 끝까지 잘 해내겠다고. 그러니까……,"
 츠카사가 눈물을 머금은 눈을 한 채 레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이제부터는, 무서워하지 마세요. 이제 이런 학원도 졸업이니까, 보고싶은 것만 보고,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가주세요. Leader. 아니, 레오 씨."
 레오가 푸핫 웃었다. 눈물이 맺힌 츠카사의 눈을 손가락으로 닦아주고, 어깨를 몇 번 더 두드려주었다. 그래, 그래. 모두 너희에게 맡기고 가는 거야. 
 "레오 군, 이제 시간 됐어. 얼른 가야지?"
 "응, 세나! 안 그래도 지금 얘기 마쳤어. 금방 갈겟!"
 레오는, 저를 부르는 이즈미의 목소리에 밝게 화답하고 츠카사의 쪽으로 고개를 돌려 활짝 웃었다. 츠카사 또한 홍조를 띄우며 밝게 웃어, 꽉 붙잡은 레오의 손을 놓아주었다.
 당신을 존경했어요.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우리들의 리더, 츠키나가 레오 씨.
1 0

새벽별

처음에는 밝은 대낮에도
환하게 빛나는 해가 되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에는
이미 나보다 더 밝은 해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밤에 
날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거리를 비추는 달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리 위에는
밤만 되면 나를 늘 따라다니던 
나보다 더 밝은 달이 있었다
그렇게 떠돌아 다니다
낮도 밤도 아닌 애매한 새벽
밤이 아쉬워 잠못드는 사람들
그 곁에 조그마한 빛을 내려주는
넓디 넓은 밤 하늘 속
새벽별이 되었다
4 1

닿을 수 없기에
아름다운
너와 닿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기를 쓰고 고개를 치켜든다
홀로 외로이
그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는
너에게
홀로 외로이
그 높은 곳에서
날 비춰주는
너에게
나는 오늘도
너와 닿기 위해
기를 쓰고 팔을 뻗어본다
닿을 수 없어
아름다운
너에게
3 0

미련

우리 함께했던 
그 시간동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근데 나만
그랬었던거 같다고
나만큼 너도
행복했다 착각했었다고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마지막 말을 전하고
돌아섰는데
몇발자국 못가서
고개를 돌리고
눈으로 뒷모습을
뒤쫓고 있었다
행복했어서
미안했어서
미련이 남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