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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조심

선호하는 야구팀 이 너무 못하고 있다어제까지 KT 하고 붙어 공동 9위 올라간다더니다 거짓말 너무 열받아서  요즘 나도모르게야구 카퍽에 너무 못한다 NC가 너무 창피하단글을 올리고 있다 그런말은 속으로 해야 되는데 자주 욱해서 야구가 내한테 안맞는 건가? 팬들도 너무 차갑고 한번만 더 글 잘못 적으면 엄마 가 폰 압수 한다는데옛날생각난다 중3 때그때 소녀시대 를 너무 좋아해서 밤늦게 까지 TV 시청해 지각하고 정신줄 차리라고엄마 가 내 뺨 때렸는데   아직 엄마가 무섭다 ...말을 조심해야겠다야구팬 들 하고는 사이가 좀 안좋은데너무 냉정하고 마음들 이 차갑고요즘 골프 가 좋아인스타 에서도   전인지 선수 나 박성현 프로 팬 들하고 대화를 하는데 골프팬들 한테는 정이 있고따뜻함 이 보인다  골프가 딱 맞는거 같다골프 기사를 보면 욕이 없고 힘이 되는글 들골프 를 보면 스윙도 배우고 싶고스크린골프장 도 가보고싶다골프선수들 에게 힘을주는명언을 남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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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1달전 한 야구선수의  아들을 보았다 
바로 내뒤에 지나갔는데 너무 귀여웠다 
사진 찍어봤으면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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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놀이

  나는 우애좋은 아빠 세대덕에 주말마다 사촌동생들을 돌보았고 육아필드에서 알아주는 선수가 되었다. 전적으로 아이들을 관리하는 건 나였다. 밥을 먹여주고 물을 떠먹이고. 울면 안아주고 쉬를 누고 싶다면 바지를 벗기고 변기에 앉혀서 같이 "쉬~~" 놀고싶다면 각종 놀이에. 그래 치이고 살았다. 힘들고 지친노동 속에서 날 구원해주는 건 다름 아닌 소꿉놀이였다. 
 소꿉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은 엄마 아빠다. 고로 포지션 선정에있어서 많은 트러블이 발생하는데 그틈에 빠르게 아기 포지션을 득해야한다. 아기는 자고 냠냠 자고 냠냠이다. 세상 꿀보직이다. 자는척 진짜 자곤 했다.
 이리 쓰다보니 그때 생각이 많이난다. 아이들을 돌보던 중학생이 군대에 다녀왔고 내 담당 아이들은 초등학생에 중학생도 몇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커서 무슨 일을 하고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끝까지 올바르게 사랑스럽게 자랐스면 한다. 우선 나부터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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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이었던

나는 어렸을때 운동선수가 꿈이었다 그래서 체육과에 진학
했지만 운동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이제는 가수가 하고 싶다 그러나 어느덧 내 나이는 30대
중반 치열한 경쟁속에서 나는 도태되고 있는것일까?
현실적인 꿈과 이상적인 꿈 사이에서 괴리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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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난 어려서 굉장히 촉망받는 운동선수였다. 라고 하기엔 그 시기가 너무 짧긴 하네.
테니스 신동 소리를 듣고, 학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9살 무렵, 아침에 300개, 점심에 200개, 저녁에 500개의 스윙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난다. 늘 손에는 물집이 잔뜩 잡혀있었고, 그렇게 운동이 끝나면 클레이 코트에 소금을 뿌리고 룰러를 밀며 다녔다.
그렇게 몇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당연히 운동선수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부상으로 명문 중학교로의 스카웃이 취소가 되고, 난 우울했던 것 같은데, 당시에 난 물론 컴퓨터반이었기도 했다. 그래서 더 미친듯이 그 세계로 뛰어들었을수도.
가장 신나던 시절은, 32bit 에서 64bit 로 cpu 가 넘어가던 시절 라이브러리들을 포팅하던 시즌. 근데, 이것도 웃긴게, 당시에 난 필리핀에 가서 일을 하던 시절이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고문당하던 시절이었다.
유레카.
난 희망이 있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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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내가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제대로 맛을 본 것은 2001년 5월 즈음이었다. 그 당시 난 이런저런 일을들 많이 하던 때였고,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의 사이버 홍보를 도와주던 시절이었다.
그런 날 중, 파트너였던 박모로부터 연락을 받고 장충동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박모와 같이 길을 걸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하고, 받고, 주고, 받고, 그러다가 발길이 머문 곳이 현재의 평양면옥 자리에 있던 리모델링 하기 전 평양면옥이었다.
당시, 평양냉면은 그다지 인기가 많던 음식도 아닌지라, 한그릇에 6천원 정도의 가격에 만두 반접시와 수육 반접시, 소주 한병 해서 2만원 내외의 가격으로 우린 점심을 즐겼다.
약간은 취기가 있지만, 일은 일인지라 나름 좋은 컨셉에 대한 설명을 했었지만, 이 양반은 그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나를 이끌었다. 그리해서 도착한 곳은 리틀야구 구장이었다.
어른 선수들의 야구 경기를 넋을 놓고 보고선 돌아왔다.
그게 내 평양냉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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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스크립트 - 넷스케이프부터 jQuery 까지

테크 전문 매체에서 자바스크립트를 "한때 우스운 언어였던" 이라고 표현한 글을 보고 넷스케이프부터 nodejs 까지 간략하게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2009년 시작된 nodejs 는 다른 글로 정리할 예정이다.
자바스크립트는 웹브라우저에서 프론트엔드의 동적인 구성과 사용성 확장을 목적으로 1995년 처음으로 넷스케이프에 탑재된 스크립트 프로그래밍 언어로 넷스케이프 직원이었던 브랜든 아이크가 개발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mocha였고 LiveScript 라는 이름을 짧게 거치며 현재의 Javascript가 됐다.
이 후 십여년간 "자바"와는 무슨 관계냐며 이유없이 욕도 많이 먹었지만 묵묵하게 웹브라우저에서 알럿창을 띄우며 훗날을 기약했다. 열심히 일했다.
브랜든 아이크가 LiveScript에서 JavaScript로 이름을 바꿀 때 최고의 인기언어였던 Java의 유명세를 의식했다는 얘기도 있으니 이유없이 먹은 욕은 아닐지도...
2002년 발명된 - 겸손한 더글라스 크락포드는 이를 발견이라고 했다 - 데이터 표현방식인 "JSON"은 사랑의 큐피트가 되어 몇몇 훌륭한 개발자들을 자바스크립트와 진하게 엮는데 성공한다.
2004년 "Web2.0" 광풍과 클라이언트-서버간의 비동기 통신 방식인 "AJAX"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자바스크립트는 웹개발의 필수요소로 떠오른다.
작은 문제라면 당시 대중적인 웹 브라우저들이 AJAX 를 각자의 방식으로 구현했었고 비동기 통신의 결과를 화면에 갱신하기 위해 필요한 DOM 검색과 선택 방식 역시 제각각이었다는 점.
이런 브라우저간의 문제는 2005년 Prototypejs를 시작으로 jQuery, script.aculo.us, MooTools, ExtJS, Dojo, YUI 등의 "자바스크립트 라이브러리"의 개발로 이어진다.
한참 시절엔 라이브러리 로고로 a4 한장을 채우고도 남았었다.
이 후 몇 년간 계속해서 새로운 라이브러리들이 개발됐고 각 라이브러리들은 DOM Selector 의 성능이나 자바스크립트 객체에 대한 철학과 디자인 패턴, 더욱 미려하고 부드러운 사용자 화면 효과 등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몇년에 걸쳐 jQuery가 승자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지면서 javascript 는 다시 한번 웹(모바일웹) 개발 필수 언어로 자리잡게된다.
이후의 싸움은 nodejs가 불을 지핀 자바스크립트 플랫폼 또는 프레임워크의 싸움으로 AngularJS, Backbone.js 등의 선수들이 등장하는 더 큰, 하지만 조용한 싸움으로 nodejs 를 다루며 얘기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