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컵을 넘치게 한 마지막 한 방울
[이제 그만 하자. 더는 너 아는 척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살자.]
오늘 몇 달간 사랑을 나누던 상대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니, '사랑을 나누'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항상 내가 사랑했고 나만 애달았을 뿐 넌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보다는 사랑을 '쏟아붓던' 상대에게 이별을 고했다고 하는 쪽이 더 맞겠다.
내가 이별을 통보하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너는 그 순간조차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보낸 말의 옆엔, 너무도 선명한 노란색 1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 말이라도 내게 해주길 바랐다. 왜 갑자기 그러느냐라든지, 내가 뭘 잘못한 것이냐라든지, 따위의 흔한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기대는 아니었다. 그때 나에게 있어 네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만큼 호사스러운 사치는 없었고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치를 부릴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저 마지막인데 이 정도는 하겠지, 라는 대책 없는 복불복이었다.
대책 없이 걸어 본 복불복은 실패였는지 넌 일주일이 넘도록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프로필은 바꾸면서, 내 메시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고의성이 다분해 보였다.
이런 인간에게 내가 몇 달이나 사랑을 쏟아부었단 말이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뭣도 모르고 콩깍지가 씌어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썼더라면, 지금 얼마나 다른 상황을 마주하고 있었을까. 상상해 보려다가 그만뒀다. 지금은 그 생각을 위한 힘마저도 아까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갑자기도 아니다. 지난 몇 달간 네가 내게 보인 태도는 나라는 물컵에 조용히 물방울을 채워가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마지막 한 방울이 물을 넘치게 한 것일 뿐이었다. 넌 항상 연락을 해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어찌어찌 기회가 생겨도 바쁘다며 끊어버렸었다. 나랑은 말도 안 하면서, 친한 지인과는 따로 연락까지 했다. 그래 놓고 만나서는 세상 다 줄 것처럼 굴며 내 비위를 맞추는 척 제 욕심만 채우려 했다. 나를 원한 게 아니라 내 몸을 원한 것은 아닌지 의심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의심이 생겼을 때 끝냈어야 했다. 무의미한 곳에 무의미하게 힘을 쏟아도 될 만큼 난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널 놓지 못했던 것은, 네 사탕발림에 넘어가 내 생각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네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3주, 아직도 노란색 1은 사라지지 않았고 난 네게서 답을 받는다는 바람조차 버렸다. 마지막으로,라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사치였던 것이다. 난 정말 끝까지 어리석었다.
끝까지 떨쳐내지 못한 어리석음을 뒤로하고, 네 계정을 차단하고 번호를 지웠다. 이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덜 어리석은 짓이었다. 네게 미련이 남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3주나 답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은 나 스스로가 아까웠다. 이젠 네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
몇 달이라는 길다고 하기엔 짧고 짧다고 하기엔 긴 시간 동안 너와 사랑이라는 것의 유사행위를 해왔던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겠지만 난 그래도 잊어버릴 것이다. 잊어야만 했다. 넌 나의 과오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그렇기에, 난 너를 기억하고 잊어야 한다.
물컵을 넘치게 한 마지막 한 방울은 결국 물을 다 쏟아버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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