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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보름달에는 토끼가 살고 있을까?"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그며, 넌 내게 물어왔다. 나는 네 옆에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토끼는 살고 있지 않아. 애초에 거기에 누가 가든 산소통 없으면 죽어. 그 말에 너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정말 낭만이 없구나!"


넌 너무 애 같고.


다시 웃음을 터뜨린 너는 한참동안 웃다가, 내게 흰 꽃을 건네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거기에 있어?"


나는 네가 건네준 꽃에 손을 뻗었다. 넌 손에서 힘을 풀었고, 꽃은 반투명한 내 손을 통과해 힘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강에 띄워진 새하얀 꽃을 바라보며, 나는 대답했다.


아니.


나는 그곳에도, 이곳에도 없어.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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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둥그란 보름달이 떳네
밤하늘의 밝은 해가 떳네
쿵쿵 절구에 토끼들 떡 지어가며
보름달을 옮기고 있네
어예쁜 보름달은 너의 마음
꽉찬 네 마음에 기쁨을
보름달이 아닐때도 있지만
그 달도 같은 달이야
보름달과 같은 네 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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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을 꿨는데..?"
아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제가.. 꽃밭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 환한 웃음에 가슴이 시리다.
너무 환해서 오히려 쓸쓸해 보이는 그런 웃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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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놈

사람들은 묻는다
왜 돌아가냐고
쭉 걸어가면 되는데
굳이 돌아가야겠냐고
나야 뭐 좋아서 돌아간것도 아닌데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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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너무 넓었다. 너무 넓어서 다 볼 수 없었다. 내 옆에 있는 너는 뭐가 보이길래 그리 뚫어져라 보고있을까. 매일 하늘을 보면 무료함이 든다. 너는 무언가 보이는 듯 하다. 난 무료함을 달래려 하늘을 보고있을까. 밤이 온 하늘은 더욱 더 광활하다. 옆을 둘러봐도 너는 없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네 생각에 나의 하늘은 점점 차오른다. 너다 너가 나타났다. 너를 안으며 말한다. 너는 나를 보고있었구나 난 널 보고있지않았다. 너의 시선을 외면하며 쓸데없는 무료를 만들었다. 너의 노력으로 난 내 하늘을 올려다 봤고 나는 너를 보지못했다. 나의 무료함은 거기서 부터 시작했다. 땅에서 부터 시작한 시선이 하늘을 보기까지 너는 나를 지켜봤구나. 너가 없다는 감정. 그 감정은 나에게 끝없는 하늘을 보게 했고 너는 기다렸구나. 이제 다시 해가 밝아온다. 나는 너에게 묻는다. 이제 하늘을 볼꺼냐고. 너는 대답한다. 너와 같이보는 하늘은 분명 넓을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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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지금 행복해?" 당연히 나는 방긋 웃으면서 다른사람들에게 말했던것처럼
대답을 했다. "응. 누군진 몰라도, 난 행ㅂ..."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적은 없었는데 왜 대답을 하지 못하였을까? 

어쩌면 행복한 척 살아왔던것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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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했다.

너는 웃을까, 화낼까
말뿐인 사과는 그만두라고 말할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까
하지만 나는 네 대답을 들을 수 없다.
내 곁에는 네가 없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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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에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깊게 꾸던 꿈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채로 눈을 뜨려했다.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속눈썹부터 파르르 떨리며 눈이 뜨이기 직전, 내 귀로 들릴리 없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잘 자네."

내 앞 머리카락을 천천히 매만지며 나즈막히 속삭이는 꿈에도 그리던 익숙한 중저음에, 나는 정말 좋으면서도 정말 슬픈.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며 당연스레 알게 된 사실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너는,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꿈이구나.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나올것만 같아서 애써 질끈 더 세게 눈을 감으면서 난 꿈에서 깨지 않기를 빌고 빌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매일매일 네 생각만 했어. 라며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난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 처럼 오로지 네 손길을 느꼈다. 
"있잖아, 너도. 그리고 나도. 되게 바보 같은 거 알지."
응, 알고 있어.

"이렇게나 좋아하면서. 사랑하면서. 대체 왜.."

...
결국 그새를 참지 못하고 소리없이 한 줄기 흘러내린 눈물은 발그랗게 적당히 붉어진 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속으로는 애타게 너를 부르고, 사랑을 속삭이고 오열하는 것이. 겉으로는 눈물 한 줄기로만 들어났다는 게 내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울지마. 네가 울면 내가 더 슬퍼."

가슴속에서 울컥 차오르는 듯한 감정을 토해내기 직전에 나는 그대로 눈을 뜨며 부드럽게 나를 감싸오던 침대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후드득. 하고 한 순간에 참아오던 눈물들이 곧바로 밑으로 떨어져 이불 위를 촉촉히 적셨다. 한 손으로 그것들을 닦아내던 나는 천천히, 꽤나 애달프게 고개를 돌려 네가 있었을 자리를 보았다.
"제발, 가지마.."

이미 너가 사라지고 난, 끝나버린 꿈에대고 나는 외쳤다. 부질 없는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처절하게 계속해서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그 자리에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난 바보같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다시 한 번 내 꿈 어딘가에 있었을 네게 말했다. 
나는 꿈결에 네게 말했다.
꿈이든 뭐든 좋으니까. 아파도 괜찮으니까, 네가 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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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차(陶車)

 01

 w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 아침 먹자. 몽롱한 채로 식탁까지 이끌려 가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갤러리가 아닌 w의 오피스텔이다. 수도 없이 들락거린 곳인데 왜인지 눈에 걸리는 것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상하네. 나 왜 여기서 잤지?
 우리 같이 살아.
 으응. 하품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뭐라고? 그는 젓가락으로 접시의 두부를 반으로 나누며 말했다. 지금은 이천십칠 년이고 우리는 서른넷이야. 그의 눈은 아주 진지하고 목소리는 덤덤했다. 나는 목을 길게 뺐다가 이내 거북이처럼 움츠렸다.
 칠 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쳤거든. 후유증으로 기억장애가 생겨서 하루가 지나면 전부 잊어버려. 먹은 음식, 만난 사람, 했던 말…
 하하. 내가 잠이 덜 깼나…
 그래도 다행이지, 나는 기억해줘서.
 아니… 진짜?
 w는 그저 웃는다. 밥 먹어. 식겠다. 세상이 천천히 기울어지고 정신이 허공을 유영한다. 나는 참사를 목격한 행인이자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당사자였다. 마음이 빈 깍지처럼 으스러지는 것을 애써 모른 체했다. 눈물을 참기에는 그편이 나았다.
 02
 나가자기에 버스를 탈 줄 알았는데 집 앞에 차가 세워져 있다. 앙증맞은 진녹색 허슬러. 이름은 봉봉이라고 했다. 사람이라도 칠까 무서워서 면허는 안 따겠다던 w는 여기저기 불법주차 된 차들을 잘도 피해 금세 대로로 나왔다.
 우리 어디 가?
 일하러.
 ……나 갤러리 안 잘렸어?
 잘렸지. 그래도 관장이 너 워낙 좋아했잖아. 아직도 그림 들고 가면 꼭 받아 줘. 가끔 전시에도 한 두 점 끼워 주고.
 남에게 나의 근황을 듣는 건 이상한 일이다. 묘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차가 신호등에 걸리자 w는 핸들에서 뗀 왼손을 내 손 위로 덮는다. 불안할 때마다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생긴 습관이었다.
 우리 카페 차렸다.
 어?
 저기 앞 골목에. 개업한 지는 삼 년 좀 넘었어.
 카페는 둘의 로망이자 이리저리 그려보던 미래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입을 열기도 전에 w는 내가 할 질문을 알고 덧붙였다.
 우리 작업실도 있어. 마음에 들 거야.
 그가 장담한 만큼 카페는 근사했다. 소파며 쿠션, 테이블 위로 길게 내려온 펜던트 조명, 선반의 작은 소품까지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w는 약간 뿌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같이 골랐으니까 당연하지. 우리는 카운터 앞의 바 테이블에 앉아 그가 내린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내가 모르는 일을 익히 해내는, 흙물 없이 깨끗한 w의 손이 서먹하다. 기억 너머에 존재할 그의 고생을 생각하자 나는 숨 쉬는 숨결마저 새삼스럽고 낯설어졌다.
 오픈 준비가 끝나자 w는 작업실로 나를 데려갔다. 아주 넓지는 않아도 작업하기에는 충분했다. 여기가 네 자리고, 이쪽 물레가 내 자리. 중고지만 가마도 있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부하게도 꿈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분명 현실이었다. 내 그림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촘촘히 쌓아 올린 익숙한 터치. 강하게 때린 빛 아래 흘러내리듯 묘사한 그림자. 테레빈과 린시드 오일을 많이 섞어 흘러내리게 만드는 특유의 방식. 그린 기억은 없지만 내 그림이다. 넋을 잃은 나를 W는 익숙하게 자리에 앉히고 팔레트를 건네주었다.
 앉아서 편하게 작업 해. 이따 점심에만 좀 도와줘.
 w가 나가자 잡다한 감상은 사라지고, 그림과 나만이 남았다. 캔버스 아래 널브러진 붓을 집어 들었다.
 03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한가해진 오후에 w는 말려둔 그릇의 굽을 깎고 초벌을 구웠다. 그동안은 내가 카운터를 지켰다. 책을 읽다 지루해진 나는 커피 머신을 만져보고 식기를 구경했다. 이제 보니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다. 어두운 조명 밑에서도 은은히 유백색 빛을 발하는 것이 그를 닮았다.
 …우리 결혼도 못 했잖아.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린 것을 용케 듣고 w가 대꾸했다. 할까? 내가 그러자면 당장 내일이라도 할 사람처럼. 아니야. 짧은 대답을 간신히 쥐어짜 내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소리가 내 심장에서 난 것만 같다.
 04
  날고 기는 천재들 사이에서 죽어가던 나를 그가 살려냈다.
 복학을 미루며 하루의 반은 술로, 나머지 반은 그림으로 보내던 휴학생 시절. 교내를 서성이다 들어간 도예과 전시에서 w를 처음 만났다. 평일 아침인 데다 졸전도 아니라서, 사람이라고는 앉아서 조는 스태프 한 명뿐이었다. 어쩐지 불쌍한 모양새라 슬쩍 깨웠더니 놀라서 퍼드덕 일어난다. 안내해 줄 수 있냐는 말에 그럼요, 고개를 끄덕이던 w. 갓 입학한 새내기처럼 반짝거리는 얼굴로 설명해주는 w.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돈 우리는 같이 스태프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w가 종이컵에 타 온 인스턴트커피를 들고.
 그럼 산디에서 도예로 전과한 거예요?
 네. 근데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거기 가서 뭐 먹고 살려고 그러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대학 원서 쓸 적에 담임도 그러지 않았던가. 회화과 말고 차라리 디자인과를 쓰는 게 어떠니. w는 활짝 웃으면서도 결연한 눈을 하고 말했다. 저는 후회 안 해요. 왜인지 그 모습이 나를 스스로 다독이게 했다.
 그는 모습이 많았다. 꾸몄을 때와 편할 때가 아주 달랐고 말할 때와 가만히 웃을 때가 또 달랐다. 밖에서 만나는 말끔한 모습도, 작업실에서 흙투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도. 전부 그려서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작업을 빛나게 할 아이디어를 자주 떠올려냈고, 그게 곧 둘을 쓸어 담는 힘이었다. 불안히 술렁이는 파도가 곧 내 인생이라고 체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랬다.
 05
 w의 말대로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 올리자 흉터가 보인다. 뒤통수부터 관자놀이 근처까지 길게 이어진 하나의 선. 종일 나를 베었던 선득한 현실감이 이번에는 멀리 달아났다. 내가 나에게서 아주 멀어졌다. 앞에 있는 거울은 누군가 나를 속여먹기 위해 그려둔 그림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리고 얼른 소파로 가 앉았다. w는 바닥에 앉아 가계부를 쓰고 있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드러난 둥근 등에서 세월을 느꼈다. 구부리면 척추가 살짝 불거지던 그의 맨 등을 좋아했는데. 준비되지 않은 말이 팝콘처럼 툭 튀겨져 나왔다.
 나 혼자 물레 위에서 뛰고 있는 것 같아.
 w가 펜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본다. 그는 영문 모르겠다는 웃음을 지었다. 일과로 잊었던 절망감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 무력하게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않으려고 종일 애썼던 것은 헛수고가 되었다.
 숨 가쁘게 뛰어도 영원히 제자리일 거 아냐.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 w는 소파 위로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가벼운 한숨이 스친다. 말을 고르고 있구나. 그의 등에 팔을 두르고 기다렸다. 따듯한 체온에 기대어 물먹은 마음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w가 뱉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있잖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기억손실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기울어진 나를 영영 무너트리는 말. 그를 힘껏 밀쳐내고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만약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한 충격 요법이라면 성공이다. 배신감으로 싸늘히 얼어붙어서 이제는 찔러 죽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네가 물어봤거든. 왜 여태 안 도망갔냐고. 안 질리느냐고.
 …….
 그때는 차마 대답을 못 했는데.
 일갈하듯 소리쳤다. 말하지 마. 그러나 결국 듣게 되리라는 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소용없으리란 걸 직감으로 알았다. w는 그가 언제나 그랬듯 사근사근 봄볕처럼 속삭였다. 너는 언제까지나 내게 목매던 시절의 너로 남아 줄 테고,
 나는 이제 사랑해달라고 구걸하지 않아도 되니까.
 송곳 같은 밤. 삼백 호쯤 되는 캔버스 가득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고운 얼굴. 그 얼굴이 절벽 끝에 간신히 매달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웃는다. 나를 아득한 심해로 던져 넣는다. w의 팔이 얼어붙은 몸을 다시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밀쳐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가 물에 적셔 마구 뭉쳐놓은 휴지 덩어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미안해.
 곧 내일이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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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머물러 있다면

조용히 가만히 그대 엾에서 조용히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당신의 물음에 대답하며 아주 아주 조용히 머물러 있을깨요 당신이 나에게 괞찮다고 말해줄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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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비가 잔뜩 쏟아지는 날이었다. 인사도 없이 불쑥 들어온 K는 사무용품과 잡동사니가 가득 든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우산도 없었는지 쫄딱 젖은 채였다. 저 상자, 너무 흔하게 봤다. 드라마에서 당장 튀어나온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잘렸어?”
 “그만둔 거야.”
 “잘렸구나.”
 “아니라니까!”
 K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상자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와르르륵. 안에 있던 것들이 쏟아지며 산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샜다.
 “…나랑 싸우러 왔어?”
 날 선 시선이 부딪혔지만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꺾일 기미가 안 보이는 소모적인 기 싸움에 내가 먼저 지쳤다.
 “후… 그래. 왔으니까 일단 들어와.”
 마지못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내자마자 녀석은 냉큼 신발을 벗었다. 질척질척 젖은 발이 마룻바닥을 찍을 때마다 물 발자국이 생겼다.
 “…저거 엎어진 건 내가 치울 테니까 가서 씻어.”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저 글러 먹은 새끼는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욕실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골 아파 진짜. 구시렁대며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대충 쓸어 담았다. 상자는 별것도 안 들은 주제에 더럽게 무거워서 구석으로 옮기는 데 꽤 힘을 들여야 했다. 울컥 짜증이 솟아서 발로 한 번 차려다가 내 발만 아플 것 같아 그만뒀다.
 마른걸레로 바닥의 물기를 훔치고,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화장실 옆에 둔 다음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물이 끓어 커피가 내려질 때쯤 화장실 문이 열렸다.
 “아, 추워.”
 “나왔냐? 옷이랑 수건은 거기.”
 머그잔 두 개에 커피를 나눠 담고 소파로 가져갔다. 물기를 닦고 옷을 주워입은 K가 제집인 양 먼저 앉아 있었다.
 “땡큐.”
 당연한 듯 컵을 받아 홀짝이는 모습에 나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재주가 있어…, 알아?”
 K는 관심 없다는 듯 짧게 물었다. 무슨 재주.
 “농사짓는 재주. 좆나 농사의 신이야.”
 “엉?”
 “민폐가 풍년이잖아 지금.”
 농담인 줄 알았는지 민폐범은 낯짝 두껍게 킬킬 웃어댔다. 진작 쫓아냈어야 했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저놈은 자리를 잡아 버렸으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왜 잘리, 아니… 왜 그만뒀는데.”
 녀석이 망나니처럼 굴지만 않았다면 가장 처음에 물어봤을 질문을 겨우 꺼냈다. 냉큼 대답할 줄 알았던 K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수건으로 대충 털고 만 머리카락에서 가끔씩 물방울이 떨어져 옷에 자국을 남겼다. 
 “…낙인 찍혀본 적 있냐?”
 고여있던 정적을 의외의 단어가 깨트렸다. 특유의 나쁜 어감은 어딘가를 관통하는 데가 있었다. K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가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번듯한 만큼 일도 사람도 체계적일 줄 알았어.”
 비죽 올라간 입꼬리가 일그러질수록 목소리도 억눌려갔다. 아래로 내리깐 시선은 건조했지만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 축축한 물기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훨씬,”
 “…….”
 “난장판이더라.”
 특히 사람이. 거기까지 내뱉은 녀석이 마지막 계단을 밟고 선 사람처럼 위태롭게 휘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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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굴던 무더위가 뚝 꺾일 즈음이 되면, 우리 마을은 어김없이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심한 날은 자기 발도 잘 안 보일 정도라, 안개라기보다는 거대한 먹구름이 온 산맥을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이걸 안개철이라고 불렀다.

 “만약 안개에 불이 붙으면, 여기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안개철은 좁은 시야만큼이나 사람의 생활도 어둡고 축축하게 만들었다. 마을에 있던 외지인들이 전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한 철 장사로 먹고 사는 이들이 반절이 넘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밟혀 죽지 않기 위해 숨을 죽여야만 했다.

 “방화범이 되고 싶은 거야?”

 내 말을 듣고 찡그린 누나의 얼굴은 여기저기 터진 상처들로 붉어 보였다. 문득 아래로 내린 시선에 걸린 것은 물결치고 있는 수많은 멍이었다. 피가 말라붙은 입안에 비린 맛이 가득했다. 나는 덜어낸 연고를 상처 위에 조심스레 바르며 대답했다.

 “아니… 오가닉 테러리스트.”
 “…머리 잘못 맞았나 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 피식 웃는다. 그제야 한 줌 번지는 웃음만이 우리가 잡고 있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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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그녀는 항상 일요일이 되면 이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언제는 책을 읽을 때도 있고 또, 언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음악을 들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커피는 카페 마키아토를 마신다.
그녀와 처음 대화를 나눈 건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 일요일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우리 카페의 손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해외유학 중 만난 점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출근한 이후로는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처음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사교성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 덕에 잦은 전학에서도 어렵지않게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유학 생활도 외롭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져 주변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아프냐는 질문에도 힘겹게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게 최선이었다.
그 일이 있고 정확히 다음 주 일요일.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도 심장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보다 진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곧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 때, 주문은 하지 않냐는 점장님의 말에 깜빡 잊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와서는
라고 슬며시 물어봤다. 심장은 멀쩡해도 여전히 떨렸던 탓에 이번에도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라떼아트를 구경하며 점장님과 함께 수다를 떨었고 나는 내가 그릴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을 그렸다.
그 후로도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그녀를 위해 그림을 그렸고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그녀는 항상 웃음으로 답했고 나는 그게 좋았다.
한 번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그녀가 걱정이 되어서 점장님께 여쭤보니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카페에 오던 도중에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그리고 몇 주간 그녀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 그린 그림이 백여 개가 될 즈음에 그녀가 찾아왔다.
변함없는 그녀의 웃음은 한 순간만에 나의 걱정을 날려버렸다. 괜찮냐는 한마디 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 놓고서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대답 대신에 슬며시 웃어 보였다. 
매일 내가 그려 놓은 라떼아트를 점장님께서 휴대폰으로 찍어 보냈다고 하셨다. 어떻게 그녀의 번호를알고있냐고 물어보니 점장님과 그녀는 남매 사이였다. 나의 사정을 알고서는 카페에 나오지 않는 동안 수화를 배우러 다녔다고 했다.

그녀와 처음으로 인사할 일요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