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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보름달에는 토끼가 살고 있을까?"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그며, 넌 내게 물어왔다. 나는 네 옆에 주저앉으며 대답했다. 토끼는 살고 있지 않아. 애초에 거기에 누가 가든 산소통 없으면 죽어. 그 말에 너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정말 낭만이 없구나!"


넌 너무 애 같고.


다시 웃음을 터뜨린 너는 한참동안 웃다가, 내게 흰 꽃을 건네며 다시 물었다.


"그럼 넌. 거기에 있어?"


나는 네가 건네준 꽃에 손을 뻗었다. 넌 손에서 힘을 풀었고, 꽃은 반투명한 내 손을 통과해 힘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강에 띄워진 새하얀 꽃을 바라보며, 나는 대답했다.


아니.


나는 그곳에도, 이곳에도 없어.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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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둥그란 보름달이 떳네
밤하늘의 밝은 해가 떳네
쿵쿵 절구에 토끼들 떡 지어가며
보름달을 옮기고 있네
어예쁜 보름달은 너의 마음
꽉찬 네 마음에 기쁨을
보름달이 아닐때도 있지만
그 달도 같은 달이야
보름달과 같은 네 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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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을 꿨는데..?"
아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제가.. 꽃밭에서 놀고 있었어요."
그 환한 웃음에 가슴이 시리다.
너무 환해서 오히려 쓸쓸해 보이는 그런 웃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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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놈

사람들은 묻는다
왜 돌아가냐고
쭉 걸어가면 되는데
굳이 돌아가야겠냐고
나야 뭐 좋아서 돌아간것도 아닌데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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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너무 넓었다. 너무 넓어서 다 볼 수 없었다. 내 옆에 있는 너는 뭐가 보이길래 그리 뚫어져라 보고있을까. 매일 하늘을 보면 무료함이 든다. 너는 무언가 보이는 듯 하다. 난 무료함을 달래려 하늘을 보고있을까. 밤이 온 하늘은 더욱 더 광활하다. 옆을 둘러봐도 너는 없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네 생각에 나의 하늘은 점점 차오른다. 너다 너가 나타났다. 너를 안으며 말한다. 너는 나를 보고있었구나 난 널 보고있지않았다. 너의 시선을 외면하며 쓸데없는 무료를 만들었다. 너의 노력으로 난 내 하늘을 올려다 봤고 나는 너를 보지못했다. 나의 무료함은 거기서 부터 시작했다. 땅에서 부터 시작한 시선이 하늘을 보기까지 너는 나를 지켜봤구나. 너가 없다는 감정. 그 감정은 나에게 끝없는 하늘을 보게 했고 너는 기다렸구나. 이제 다시 해가 밝아온다. 나는 너에게 묻는다. 이제 하늘을 볼꺼냐고. 너는 대답한다. 너와 같이보는 하늘은 분명 넓을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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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지금 행복해?" 당연히 나는 방긋 웃으면서 다른사람들에게 말했던것처럼
대답을 했다. "응. 누군진 몰라도, 난 행ㅂ..."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적은 없었는데 왜 대답을 하지 못하였을까? 

어쩌면 행복한 척 살아왔던것이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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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무슨 악마의 장난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다니엘라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러고는 가벼이 악마를 입에 올린 자신을 탓하며 성호를 그엇다. 하늘의 계신 아버지. 저의 죄를 사해주소서.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는 두손을 부지런히 놀려 잠두와 완두콩을 손질했다.
잠두와 완두콩의 깍지를 제거하고, 껍질콩의 꼬투리를 다듬고, 줄기콩대를 바구니에서 꺼내자 그때서야 아궁이에 올려둔 물이 끓어올랐다. 다니엘라는 뜨거운 냄비속으로 잠두를 와르르 쏟아부었다. 콩 알갱이들이 휘청거리며 물속을 유영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니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전 마을로 들어온 여행객 하나가 다니엘라의 평화로운 일상을 망치고 있었다. 적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한 여름날 두툼한 망토를 입고 나타났던 그 남자는 놀라울정도로 마을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렇게 사교적이고 친화력 좋은 남자와 다니엘라는 이상하게도 이 좁은 마을에서 일주일 내내 마주치지 못했다. 그것이 오늘, 남자가 다니엘라의 무거운 물통을 집까지 옮겨주면서 끝났다. 남자는 동행하는 내내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게 다니엘라를 대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보답을 해주겠다는 다니엘라의 의사에 남자는 흔쾌히 청혼의 말을 내뱉었다.
다니엘라는 이 가벼운 청혼을 거절했고 남자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럼 식사라도 대접해달라며 그녀의 현관겸 응접실에 앉아서 다니엘라가 내어준 백탕을 마시고 있었다.
다니엘라는 물이 넘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나머지 콩들을 냄비에 쏟아부었다. 그녀는 빠릿하게 움직이며 우묵한 나무 그릇에 파와 박하를 잘게 썰어 담고 익은 콩들을 구멍이 뚫린 주걱으로 건져올렸다. 그릇에 삶은 콩을 넣은뒤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를 솔솔 뿌리곤 주걱으로 샐러드를 버무리자 박하의 싸한 향기와 콩의 달큰하고 포근한 향이 한데 뒤섞였다. 미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다니엘라는 미소 지었다. 레몬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테지만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다니엘라는 그릇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의자에 앉아 두손안에 쥔 찻잔을 굴리고 있던 남자가 다니엘라를 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와요. 여기 앉아요.]
다니엘라는 자신의 집에서 어서오라는 인사를 받는게 퍽 낯선 상황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작은탁자에 그릇을 올려두곤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다니엘라는 남자가 비워둔 의자를 가르키곤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소매자락을 끌어당기자 그가 쉽게 끌려왔다. [여기 앉으라고요?] 남자는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살풋 미소지었다.
[다정하네...역시 결혼할래요?]
다니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왜요?]
다니엘라는 대답 대신 그릇의 한쪽면을 탁탁 치곤 스푼의 손잡이가 남자의 쪽으로 향하게 내려놓았다.
[역시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는거겠죠?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있을거에요? 그냥 내가 선채로 먹는게 더 나을것같은데, 아니면 내 무릎에 앉는건.] 다니엘라는 바느질감을 넣어두는 상자를 가져와서 그위에 앉았다. [싫다 이거죠? 알았어요. 하지만 정말 첫눈에 반했다고요. 포기하지 않을거에요.]
남자는 다니엘라가 곤란해할 말만 골라하며 콩 박하 샐러드를 한입 먹었다. 그리고는 또 한입.
[우와!! 여기 뭐가 들어간거에요? 아주, 냠. 아주 맛있는데요?] 남자의 뒤엣말은 입안에 들어찬 음식물탓에 웅얼거리며 끝났다. 다니엘라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려깔자. 남자는 더 열정적으로 샐러드를 우물거렸다.
[응식점울 해도 대갰응요]
다니엘라는 풋 웃고는 남자에게 다시 물을 따라줬다. 샐러드 그릇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 엄청나게 빠른 식사 속도에 다니엘라는 오늘따라 놀랄일이 많은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너무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다니엘라는 겸양하는 동작을 하곤 자신도 고맙다며 물통과 남자를 번갈아가며 손짓하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일으켰다. 남자는 베시시 웃었다.
[그런 의미로 다음엔 제가 대접하도록 할까요? 혹시 파스티 좋아해요? 제가 아주 기가막히게 만들거든요.]
다니엘라는 파스티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는 그것을 알아차리곤 더 자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지, 단순히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앉아있는 의자를 끌고 다니엘라의 곁에 바싹 붙어앉았다.
[페이스트리 반죽에 만두처럼 버섯이랑 감자속을 넣어 만드는건데 아주 맛있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는게 어때요? 전 이 마을이 아주 마음에 들고 한동안 여기서 살 집도 구해놨거든요. 내일 집들이 기념으로 파스티를 대접할게요.] 참고로 당신 집에서처럼 아무짓도 안할게요. 남자는 덧붙이며 자신의 레이디에게 기사들이 맹세하듯 경례했다. 다니엘라가 깜짝 놀랄정도로 절도있는 동작이였다.
[대도시에서 제가 파스티 장사를 했었거든요. 그러니, 기대해도 좋아요?]
다니엘라는 어느새 '다음' 약속이 생긴것을 기뻐해야할지 곤란해야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남자는 속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불현듯 몸을 경직시켰다. 다니엘라는 갑자기 긴장하는 남자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라가 남자의 초조한 얼굴을 바라보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마저 말했다. [다니엘라.] 다니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결혼할래요?]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곤 그릇을 설겆이 하기 위해 챙겼다. 그러는 그녀의 손목을 남자가 황급히 잡고는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번건 취소! 이번건 카운터에 더하지 말아줘요!!] 무슨 카운터? 다니엘라는 눈을 꿈벅거렸다.
[물론 다니엘라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요. 우선 묻고싶은게 있어요.] 다니엘라는 남자의 눈을 다시 바라봤다. 초콜릿처럼 짙은 고동색 눈이였다.
[내 이름이 뭔지 알아요?]
다니엘라는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러고보니 여태 남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남자가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네요.]
남자는 다니엘라의 손을 가져가서 손바닥 위에 천천히 스펠링을 적었다. 다니엘라는 소리내어 그것을 읽지 못했지만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글자체로 그의 이름을 만들었다. 먹빛의 바탕위로 하얀 붓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완만하게 올라오고 우아하게 끝났다.
발렌타인.
[네, 다니엘라.]
남자의 대답에 다니엘라는 깜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떨었다. 들었을리 없었지만 남자는, 발렌타인은 그녀에게 대답했다. 발렌타인이 다니엘라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다니엘라는 단순히 그가 그녀의 눈빛을 읽은것이고, 타이밍을 잘 맞춘것뿐이라는걸 알았지만 왠지 그 눈빛을 피할수가 없었다.
[다시 불러줘요.]
다니엘라는 주저했다. 발렌타인은 알수없는 미소를 지은채 그녀를 기다렸다.
또 다시 마음속에서 떨리듯 글자가 움직였다.
발렌타인.
이번 대답은 좀 늦었다. 발렌타인이 좋아 죽겠다는듯 웃고있었기 때문이다.
[네, 다니엘라.]
다니엘라는 손을 빼내려했다. 발렌타인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다니엘라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발렌타인.
[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 대답할게요.]
놓아달라는 말이였는데. 다니엘라가 발렌타인을 빤히 응시하자 그는 그 시선을 뻔뻔하게 무시했다. 다니엘라는 발렌타인이 대접하는 파스티 식사를 꼭 받겠다고 확답을 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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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했다.

너는 웃을까, 화낼까
말뿐인 사과는 그만두라고 말할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까
하지만 나는 네 대답을 들을 수 없다.
내 곁에는 네가 없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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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차(陶車)

 01

 w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 아침 먹자. 몽롱한 채로 식탁까지 이끌려 가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갤러리가 아닌 w의 오피스텔이다. 수도 없이 들락거린 곳인데 왜인지 눈에 걸리는 것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상하네. 나 왜 여기서 잤지?
 우리 같이 살아.
 으응. 하품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뭐라고? 그는 젓가락으로 접시의 두부를 반으로 나누며 말했다. 지금은 이천십칠 년이고 우리는 서른넷이야. 그의 눈은 아주 진지하고 목소리는 덤덤했다. 나는 목을 길게 뺐다가 이내 거북이처럼 움츠렸다.
 칠 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쳤거든. 후유증으로 기억장애가 생겨서 하루가 지나면 전부 잊어버려. 먹은 음식, 만난 사람, 했던 말…
 하하. 내가 잠이 덜 깼나…
 그래도 다행이지, 나는 기억해줘서.
 아니… 진짜?
 w는 그저 웃는다. 밥 먹어. 식겠다. 세상이 천천히 기울어지고 정신이 허공을 유영한다. 나는 참사를 목격한 행인이자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당사자였다. 마음이 빈 깍지처럼 으스러지는 것을 애써 모른 체했다. 눈물을 참기에는 그편이 나았다.
 02
 나가자기에 버스를 탈 줄 알았는데 집 앞에 차가 세워져 있다. 앙증맞은 진녹색 허슬러. 이름은 봉봉이라고 했다. 사람이라도 칠까 무서워서 면허는 안 따겠다던 w는 여기저기 불법주차 된 차들을 잘도 피해 금세 대로로 나왔다.
 우리 어디 가?
 일하러.
 ……나 갤러리 안 잘렸어?
 잘렸지. 그래도 관장이 너 워낙 좋아했잖아. 아직도 그림 들고 가면 꼭 받아 줘. 가끔 전시에도 한 두 점 끼워 주고.
 남에게 나의 근황을 듣는 건 이상한 일이다. 묘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차가 신호등에 걸리자 w는 핸들에서 뗀 왼손을 내 손 위로 덮는다. 불안할 때마다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생긴 습관이었다.
 우리 카페 차렸다.
 어?
 저기 앞 골목에. 개업한 지는 삼 년 좀 넘었어.
 카페는 둘의 로망이자 이리저리 그려보던 미래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입을 열기도 전에 w는 내가 할 질문을 알고 덧붙였다.
 우리 작업실도 있어. 마음에 들 거야.
 그가 장담한 만큼 카페는 근사했다. 소파며 쿠션, 테이블 위로 길게 내려온 펜던트 조명, 선반의 작은 소품까지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w는 약간 뿌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같이 골랐으니까 당연하지. 우리는 카운터 앞의 바 테이블에 앉아 그가 내린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내가 모르는 일을 익히 해내는, 흙물 없이 깨끗한 w의 손이 서먹하다. 기억 너머에 존재할 그의 고생을 생각하자 나는 숨 쉬는 숨결마저 새삼스럽고 낯설어졌다.
 오픈 준비가 끝나자 w는 작업실로 나를 데려갔다. 아주 넓지는 않아도 작업하기에는 충분했다. 여기가 네 자리고, 이쪽 물레가 내 자리. 중고지만 가마도 있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부하게도 꿈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분명 현실이었다. 내 그림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촘촘히 쌓아 올린 익숙한 터치. 강하게 때린 빛 아래 흘러내리듯 묘사한 그림자. 테레빈과 린시드 오일을 많이 섞어 흘러내리게 만드는 특유의 방식. 그린 기억은 없지만 내 그림이다. 넋을 잃은 나를 W는 익숙하게 자리에 앉히고 팔레트를 건네주었다.
 앉아서 편하게 작업 해. 이따 점심에만 좀 도와줘.
 w가 나가자 잡다한 감상은 사라지고, 그림과 나만이 남았다. 캔버스 아래 널브러진 붓을 집어 들었다.
 03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한가해진 오후에 w는 말려둔 그릇의 굽을 깎고 초벌을 구웠다. 그동안은 내가 카운터를 지켰다. 책을 읽다 지루해진 나는 커피 머신을 만져보고 식기를 구경했다. 이제 보니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다. 어두운 조명 밑에서도 은은히 유백색 빛을 발하는 것이 그를 닮았다.
 …우리 결혼도 못 했잖아.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린 것을 용케 듣고 w가 대꾸했다. 할까? 내가 그러자면 당장 내일이라도 할 사람처럼. 아니야. 짧은 대답을 간신히 쥐어짜 내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소리가 내 심장에서 난 것만 같다.
 04
  날고 기는 천재들 사이에서 죽어가던 나를 그가 살려냈다.
 복학을 미루며 하루의 반은 술로, 나머지 반은 그림으로 보내던 휴학생 시절. 교내를 서성이다 들어간 도예과 전시에서 w를 처음 만났다. 평일 아침인 데다 졸전도 아니라서, 사람이라고는 앉아서 조는 스태프 한 명뿐이었다. 어쩐지 불쌍한 모양새라 슬쩍 깨웠더니 놀라서 퍼드덕 일어난다. 안내해 줄 수 있냐는 말에 그럼요, 고개를 끄덕이던 w. 갓 입학한 새내기처럼 반짝거리는 얼굴로 설명해주는 w.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돈 우리는 같이 스태프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w가 종이컵에 타 온 인스턴트커피를 들고.
 그럼 산디에서 도예로 전과한 거예요?
 네. 근데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거기 가서 뭐 먹고 살려고 그러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대학 원서 쓸 적에 담임도 그러지 않았던가. 회화과 말고 차라리 디자인과를 쓰는 게 어떠니. w는 활짝 웃으면서도 결연한 눈을 하고 말했다. 저는 후회 안 해요. 왜인지 그 모습이 나를 스스로 다독이게 했다.
 그는 모습이 많았다. 꾸몄을 때와 편할 때가 아주 달랐고 말할 때와 가만히 웃을 때가 또 달랐다. 밖에서 만나는 말끔한 모습도, 작업실에서 흙투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도. 전부 그려서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작업을 빛나게 할 아이디어를 자주 떠올려냈고, 그게 곧 둘을 쓸어 담는 힘이었다. 불안히 술렁이는 파도가 곧 내 인생이라고 체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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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의 말대로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 올리자 흉터가 보인다. 뒤통수부터 관자놀이 근처까지 길게 이어진 하나의 선. 종일 나를 베었던 선득한 현실감이 이번에는 멀리 달아났다. 내가 나에게서 아주 멀어졌다. 앞에 있는 거울은 누군가 나를 속여먹기 위해 그려둔 그림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리고 얼른 소파로 가 앉았다. w는 바닥에 앉아 가계부를 쓰고 있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드러난 둥근 등에서 세월을 느꼈다. 구부리면 척추가 살짝 불거지던 그의 맨 등을 좋아했는데. 준비되지 않은 말이 팝콘처럼 툭 튀겨져 나왔다.
 나 혼자 물레 위에서 뛰고 있는 것 같아.
 w가 펜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본다. 그는 영문 모르겠다는 웃음을 지었다. 일과로 잊었던 절망감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 무력하게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않으려고 종일 애썼던 것은 헛수고가 되었다.
 숨 가쁘게 뛰어도 영원히 제자리일 거 아냐.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 w는 소파 위로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가벼운 한숨이 스친다. 말을 고르고 있구나. 그의 등에 팔을 두르고 기다렸다. 따듯한 체온에 기대어 물먹은 마음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w가 뱉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있잖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기억손실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기울어진 나를 영영 무너트리는 말. 그를 힘껏 밀쳐내고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만약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한 충격 요법이라면 성공이다. 배신감으로 싸늘히 얼어붙어서 이제는 찔러 죽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네가 물어봤거든. 왜 여태 안 도망갔냐고. 안 질리느냐고.
 …….
 그때는 차마 대답을 못 했는데.
 일갈하듯 소리쳤다. 말하지 마. 그러나 결국 듣게 되리라는 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소용없으리란 걸 직감으로 알았다. w는 그가 언제나 그랬듯 사근사근 봄볕처럼 속삭였다. 너는 언제까지나 내게 목매던 시절의 너로 남아 줄 테고,
 나는 이제 사랑해달라고 구걸하지 않아도 되니까.
 송곳 같은 밤. 삼백 호쯤 되는 캔버스 가득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고운 얼굴. 그 얼굴이 절벽 끝에 간신히 매달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웃는다. 나를 아득한 심해로 던져 넣는다. w의 팔이 얼어붙은 몸을 다시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밀쳐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가 물에 적셔 마구 뭉쳐놓은 휴지 덩어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미안해.
 곧 내일이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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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에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깊게 꾸던 꿈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채로 눈을 뜨려했다.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속눈썹부터 파르르 떨리며 눈이 뜨이기 직전, 내 귀로 들릴리 없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잘 자네."

내 앞 머리카락을 천천히 매만지며 나즈막히 속삭이는 꿈에도 그리던 익숙한 중저음에, 나는 정말 좋으면서도 정말 슬픈.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며 당연스레 알게 된 사실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너는,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꿈이구나.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나올것만 같아서 애써 질끈 더 세게 눈을 감으면서 난 꿈에서 깨지 않기를 빌고 빌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매일매일 네 생각만 했어. 라며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난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아이 처럼 오로지 네 손길을 느꼈다. 
"있잖아, 너도. 그리고 나도. 되게 바보 같은 거 알지."
응, 알고 있어.

"이렇게나 좋아하면서. 사랑하면서. 대체 왜.."

...
결국 그새를 참지 못하고 소리없이 한 줄기 흘러내린 눈물은 발그랗게 적당히 붉어진 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속으로는 애타게 너를 부르고, 사랑을 속삭이고 오열하는 것이. 겉으로는 눈물 한 줄기로만 들어났다는 게 내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울지마. 네가 울면 내가 더 슬퍼."

가슴속에서 울컥 차오르는 듯한 감정을 토해내기 직전에 나는 그대로 눈을 뜨며 부드럽게 나를 감싸오던 침대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후드득. 하고 한 순간에 참아오던 눈물들이 곧바로 밑으로 떨어져 이불 위를 촉촉히 적셨다. 한 손으로 그것들을 닦아내던 나는 천천히, 꽤나 애달프게 고개를 돌려 네가 있었을 자리를 보았다.
"제발, 가지마.."

이미 너가 사라지고 난, 끝나버린 꿈에대고 나는 외쳤다. 부질 없는 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처절하게 계속해서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그 자리에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아 난 바보같은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다시 한 번 내 꿈 어딘가에 있었을 네게 말했다. 
나는 꿈결에 네게 말했다.
꿈이든 뭐든 좋으니까. 아파도 괜찮으니까, 네가 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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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비가 잔뜩 쏟아지는 날이었다. 인사도 없이 불쑥 들어온 K는 사무용품과 잡동사니가 가득 든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우산도 없었는지 쫄딱 젖은 채였다. 저 상자, 너무 흔하게 봤다. 드라마에서 당장 튀어나온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잘렸어?”
 “그만둔 거야.”
 “잘렸구나.”
 “아니라니까!”
 K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상자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와르르륵. 안에 있던 것들이 쏟아지며 산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샜다.
 “…나랑 싸우러 왔어?”
 날 선 시선이 부딪혔지만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꺾일 기미가 안 보이는 소모적인 기 싸움에 내가 먼저 지쳤다.
 “후… 그래. 왔으니까 일단 들어와.”
 마지못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내자마자 녀석은 냉큼 신발을 벗었다. 질척질척 젖은 발이 마룻바닥을 찍을 때마다 물 발자국이 생겼다.
 “…저거 엎어진 건 내가 치울 테니까 가서 씻어.”
 내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저 글러 먹은 새끼는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욕실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골 아파 진짜. 구시렁대며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대충 쓸어 담았다. 상자는 별것도 안 들은 주제에 더럽게 무거워서 구석으로 옮기는 데 꽤 힘을 들여야 했다. 울컥 짜증이 솟아서 발로 한 번 차려다가 내 발만 아플 것 같아 그만뒀다.
 마른걸레로 바닥의 물기를 훔치고,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화장실 옆에 둔 다음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물이 끓어 커피가 내려질 때쯤 화장실 문이 열렸다.
 “아, 추워.”
 “나왔냐? 옷이랑 수건은 거기.”
 머그잔 두 개에 커피를 나눠 담고 소파로 가져갔다. 물기를 닦고 옷을 주워입은 K가 제집인 양 먼저 앉아 있었다.
 “땡큐.”
 당연한 듯 컵을 받아 홀짝이는 모습에 나는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재주가 있어…, 알아?”
 K는 관심 없다는 듯 짧게 물었다. 무슨 재주.
 “농사짓는 재주. 좆나 농사의 신이야.”
 “엉?”
 “민폐가 풍년이잖아 지금.”
 농담인 줄 알았는지 민폐범은 낯짝 두껍게 킬킬 웃어댔다. 진작 쫓아냈어야 했는데. 이미 때는 늦었고 저놈은 자리를 잡아 버렸으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왜 잘리, 아니… 왜 그만뒀는데.”
 녀석이 망나니처럼 굴지만 않았다면 가장 처음에 물어봤을 질문을 겨우 꺼냈다. 냉큼 대답할 줄 알았던 K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수건으로 대충 털고 만 머리카락에서 가끔씩 물방울이 떨어져 옷에 자국을 남겼다. 
 “…낙인 찍혀본 적 있냐?”
 고여있던 정적을 의외의 단어가 깨트렸다. 특유의 나쁜 어감은 어딘가를 관통하는 데가 있었다. K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가 이내 비웃음을 흘렸다.
 “번듯한 만큼 일도 사람도 체계적일 줄 알았어.”
 비죽 올라간 입꼬리가 일그러질수록 목소리도 억눌려갔다. 아래로 내리깐 시선은 건조했지만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 축축한 물기를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훨씬,”
 “…….”
 “난장판이더라.”
 특히 사람이. 거기까지 내뱉은 녀석이 마지막 계단을 밟고 선 사람처럼 위태롭게 휘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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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머물러 있다면

조용히 가만히 그대 엾에서 조용히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당신의 물음에 대답하며 아주 아주 조용히 머물러 있을깨요 당신이 나에게 괞찮다고 말해줄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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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짙은

"당신은 만날때마다 검정이네요."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늘어진 머리칼과 검정색 셔츠, 검정색 가디건과 검정색 면바지의 남자는 한쪽손에 벗어든 검정색 신발을 쥐고 있었다.
남자의 하얀 발 아래로 파도가 넘실거리는것이 보였다.
"안 추워요?"
허리까지 물에 잠긴 내가 할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나는 얼음장같은 바닷물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다. 나는 깊게 숨쉬려 노력했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냉기에 제대로 움직일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 모든일에 자신은 관계없다는듯이, 너무나 태연하게.
"안 추,워요?"
떨리는 턱에 힘을 주며 다시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내 입가가 희미하게 미소짓는것이 느껴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자가 대답해주는건.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변덕을 부리고 있는 것 일까.
"추운데, 왜 여기있어요?"
울고있던 내 얼굴로 남자가 시선을 던졌다.
"나 때문에요?"
남자는 침묵했다.
"날 보러온거에요?"
재차묻자 긍정하듯 남자가 얕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요? 내가 어떻게 뒈지나 보고, 보고싶어서, 왔어요?"
나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두팔로 내 몸을 힘껏 껴안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추워서 참을수가 없었다. 두 손과 두 팔이 가슴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도록 나는 품에 나를 묻었다.
"네깟게 어디까지 버티나, 얼마나 괴로워 해야. 고통받아야, 제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궁리하다가. 이제, 죽을테니까. 어떻게 죽나, 궁금해서 찼아왔어요? 부모도 죽고, 형제도 죽고, 친척도 죽고, 친구도 죽고,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자살하나,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찼아온거에요?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요?"
나는 정신나간 여자처럼 중얼거리며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요, 궁금했어요. 왜 내곁에 누군가 죽을때마다 당신이 나타나는지 궁금했어요. 당신은 저승사자에요? 천사같은거에요?"
남자의 하얀발은 미동도없이 그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고해성사 하듯 고개를 숙이고 그 발을 바라봤다.
"이런게, 저승사자면 천사면.
지옥에 떨어져도 필요없어요, 나는."
부모님이 눈앞에서 돌아가시던 8살때부터 내앞에 나타난 남자는 한번도 내 물음에 입을 열어 대답한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묻고야 말았다.
"왜, 나한테 죽어버리라고 말 안해요? 왜 계속 날 구해줘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거기 있는건 서리 내린 들판처럼 차고 시린 눈이었다.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남자는 짙은 눈으로 날 내려다 봤다.
"그래야."
대답없던 자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나는 숨쉬는것마저 잊고 홀린듯 그 입술을 바라봤다.
몸을 굽힌 남자가 바다속에서 내몸을 끌어올렸다. 출렁이는 파도가 떠나지 말라며 내 젖은 옷깃을 끌어당겼다.
차가운 귓가로 남자가 속삭였다. 나는 겁에 질려서, 안도감에, 예상했던 대답에.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야말았다.
남자가 말했다.
"그래야. 고통이 계속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