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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함 (완성X)

불안함에 몸을 떨으며 

시선을 둘 곳을 잃은 채

그저 아래만 응시하고 있다


혹여나 누구와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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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바브나무

- 홍수 21

물병자리를 응시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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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의 법칙

어제도 그제도 작년이맘때도 난 열심히 패달을 밟았다. 작년엔 패달이 날라가고 어젠 뒷 휀다가 분리됐다. 난 하인리히의 법칙을 대략 알지만,  귀차니즘이라는 가면을 쓰고 애써 전조증상들을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 똑바로 응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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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

저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복잡한 주택가를 올라가는 길, 자주 지나가던 골목에 있는 집은 오늘도 불이 꺼져있었다.
아,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리다보니 눈에 익었다. 빌라의 3층이라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 커튼도, 사람의 흔적도 없이 열려있는 창문, 불 켜진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집은 마치 세계가 달라지는 기점 같았다.
어두운 그 안을 보고있자면, 인기척 하나 없는 어두움을 응시하자면 그 집 안에 들어가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멈추고 밤이 깜깜할때는 마치 온 우주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불이 켜진 상가와 바삐 오가는 사람들은 지구에, 나는 외우고있는 별의 순서에서도 맨 끝인 명왕성에 있다. 행성의 지위도 잃어버린 왜소행성에.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존재조차 희미한 별인 명왕성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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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정류장

추적추적 빗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늘어만 가는 빗방울을 보곤 한숨 쉬었다. 이래서야 집에 어떻게 돌아가라고. 버스를 타고 간다지만 축축한 채 집에 도착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아까까지만 해도 밝던 하늘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일기예보라도 챙겨볼걸. 그럼 우산이라도 있었을텐데. 비에 반쯤 젖어버린 책가방과 교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분명 잘 말려야겠지. 버스가 오고가고,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수 번 보았다. 운도 참 없지, 내리는 비를 받아내었던 어깨는 젖어 차가워진 옷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전 재산인 천원짜리 지폐 세 장과 동전 두어 개 정도가 눈에 띌 뿐이었다. 이래서야 비를 피할수도 우산을 살 수도 없잖아. 깊게 한숨쉬고는 이전보다 한껏 어두워진 하늘을 응시했다. 운도 없고, 기분도 별로 좋지 않은 하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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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청년

 겨울이 되자 유난히 자주 코피가 터졌다. 예고 없이 떨어지는 핏방울은 가지런히 개어두었던 빨래와 아끼던 목도리에 자국을 남기고 기껏 복사한 서류를 붉게 적셨다. 지리멸렬했던 한 해가 끝나 제야의 종이 나를 새해로 떠밀었던 순간에도 그랬다. 피가 좀처럼 멎지 않아 휴지 한 통을 다 쓸 만큼 애를 먹었다.
 
 달력을 넘기면서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이들 특유의 요란함이 왜 내게는 없는지 생각했다. 새해가 뭐. 당분간 연도를 쓰다 끝자리 숫자를 다시 고치게 될 거라는 점 말고는 와닿는 것이 없는데. 이제 나는 반이 바뀔 일도 없고 수강 신청을 할 일도 없으니 언제나 어제 같은 오늘, 작년 같은 새해였다. 가끔 짙은 안개 같은 무력감이 깔릴 때면 말해 보고 싶기도 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살아갈 이유를 모르겠어요. 우리는 왜 삶의 끝을 결정할 수 없을까요. 하지만 막상 병원에 가려니 마음이 안 먹힌다. 결국 가는 곳은 늘 교보문고였다. 마음이 복잡해지면 책 냄새를 맡으며 자기계발과 심리학 코너를 빙빙 도는 것이다. 이런 거 읽으면 좀 좋아질까. 무심코 중얼거렸는데 누군가 불쑥 대답했다.
 “그거보다는 이게 더 나을걸요.”
 깜짝 놀라서 옆을 쳐다보자 씩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가 하도 태연해서 내가 아는 사람이었나 잠시 고민했다.
 “이십 대 초반이시죠?”
 “그런데요.”
 “아,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M 출판사 직원인데요, 요즘 이십 대들은 어떤 책 좋아하는지 조사하고 있거든요.”
 내미는 명함보다 길고 가느다란 손마디와 매끄러운 손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에는 도톰한 흰색 종이에 진초록으로 찍힌 글자가. M 출판사 마케팅부 D 대리. 받았으니 나도 줘야 하나? 잘은 몰라도 일단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와, 직장인이었어요? 어려 보여서 학생인 줄 알았는데.”
 “어린 건 맞아요. 스물둘.”
 D는 겨우 스물 예닐곱 정도로 보였지만, 사회생활에 익숙한 사람 특유의 유연한 반응, 세련됨, 오랜 시간 갈리고 축적되어 생겨난 둥근 석공 같은 단단함이 있었다. 요령 없이 서툴러서 죽고 싶은 나는 가질 수 없는 것. 붙임성도 좋아 낯가림이 심한 나를 그 자리에서 웃게 만들었다. 서점에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과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내가 들고 있던 책에서부터 요즘 뜨는 베스트셀러, 하는 일 얘기까지 이어지던 대화가 끝날 무렵이었다.
 
 “혹시 내일 시간 되나요? 오늘 주말이라 인터뷰 용지가 회사에 있어서, 괜찮으면 내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어….”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그가 마치 손수건을 권하듯 웃음을 건넸다. 인터뷰하면 책도 보내드려요. 활짝 올라간 입매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입술이 고우시네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할까 봐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하죠, 뭐.”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나이는 올해로 서른하나. 서초동에 살고, 날씬한 몸매에 윤기나는 갈색 털을 가진 아비니시아 고양이를 길렀다. 나는 보기보다 많은 D의 나이와 주인과 똑닮은 고양이의 생김새에 놀랐다. D가 그의 집에서 정반대인 내 회사 근처로 온다는 것을 말려 중간 지점에서 보기로 했다. 퇴근하고 역 출구로 나오자 약속 시간 전인데도 벌써 나를 기다리는 뒷모습이 보였다.
 “어. 어제 봤을 때보다 더 예쁘네요.”
 “오늘 미팅 있어서요.”
 “맞아, 직장인이지 참. K 씨가 어려서 자꾸 잊게 되네요.”
 봄은 아직 멀어서 여전히 해가 짧고 칼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조금 걷다가 발견한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D가 따듯한 커피 두 잔을 시키면서 물었다.
 “배고프죠? 뭐 빵 같은 거라도 먹을래요?”
 “아, 괜찮…”
 “여기 케이크도 많네. 혹시 단 거 싫어해요?”
 나를 살피는 두 눈이 묘하게 반짝거린다. 좋아한다고 대답하자 그는 한껏 기쁜 얼굴로 케이크 두 개를 추가했다. 
 납작한 가죽 가방에서 설문지와 펜을 꺼내든 D는 질문을 읽어주고 내 대답을 적었다. 처음에는 평범하고 예상 가능한 질문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지,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뭔지, 특별히 관심 있는 장르가 있는지. 서로 흥미 있는 책이 맞물릴 때마다 잡담으로 빠져서 진행이 더뎠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한 달에 책 몇 권 정도 읽어요?”
 “요즘 바빠서 많이는 못 읽고… 한 달에 두 권쯤.”
 “진짜? 그거 엄청 다독 아니에요? 요즘 일 년에 세 권도 못 채우는 사람 수두룩해요.”
 “그래요?”
 “그럼요. 회사 다니면서 바쁜데 대단한 거죠.”
 나는 D의 공들여 손질된 단정한 머리카락, 커피를 불어 마시는 입술, 내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대답을 기다려주는 차분한 눈, 영영 질리지 않을 새그러운 웃음을 보았다. 시간이 많았으면, 질문이 좀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고 헛되이 바랐다. 어느새 설문지는 마지막 장이었다.
 “이건 좀 추상적인 질문이라,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으면 건너뛰어도 돼요.”
 “네.”
 “K 씨는 책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선뜻 운을 떼놓고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는 책이 삶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어서 떠오른 뒷말은 목구멍으로 삼키지 못하고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게 곧 무너질 삶이라도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뿌리가 필요하잖아요. D는 대답을 바로 적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미미하게 떠돌던 웃음이 곧 진하게 번졌다. 와, K 씨.
 “보기 드문 청년이네요.”
 짧은 시간 동안 목소리를 잃었다. 호흡을 잃고 시간을 잃었다. D의 말이 나를 순간 속에 박제했다. 나는 종교 대신 다른 것을 믿었다. 많은 이들이 하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 몸의 수분은 빗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심장을 관통하는 음악과 영화도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고 내게는 그것을 헤쳐나갈 에너지가 없다. 열정을 불태우고 증명하며 나아지지 않을 삶을 일구는 것은 너무나 혼곤한 일이다.
 “진짜로요. 우리 회사 데려가고 싶다. K 씨 글도 잘 쓰죠?”
 그럼에도 숨을 붙잡는 것은 그 부질없는, 어쩌면 인사치레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말이었다. 한심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이었으므로.
 가끔 쓰는 일기와 졸업 후 질리도록 썼던 자소서, 취미로 쓰는 글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막차 시간 직전에 카페를 나왔다. 눈은 그치고 바닥만 젖어 있었다. 우리는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역까지 나를 데려다준 D는 주차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나는 꾸벅 인사하고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다 도로 올라가 그를 붙잡았다. 저기.
 “…또 연락해도 되나요?”
 
 D는 동그랗게 떴던 눈을 반달처럼 접어 웃었다. 그럼요. 다음에는 맛있는 거 사줄게요. 언젠가 비에 녹아 스러지는 것, 달의 인력, 영원히 팽창하는 우주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D야말로 드문 청년이었고 나는 나를 버리는 마음을 조금 누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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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새로운 시작

나는 이제 라빗츠의 리더야.
나즈나는 거울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는..인형이 아니야.발키리 따위는...잊어야만 하니까.'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하여 가위를 들었건만.
..어째서 손이 움직이지 않는걸까.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어째서,어째서?
나는 발키리를..스승님과 미카칭을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나는..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대로..정말 나는..
나즈나는 가위를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타앙-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가위는 책상 뒤로 모습을 감췄다.
나즈나는 잠시 멍하게 그것을 응시하다 문득 스친 생각에 휙
고개를 들었다.
나즈나는 제가 던진 가위를 다시 주워들고서는 오른쪽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밝게 웃으며 발키리 유닛 탈퇴서를 찢어내었다.
..그래.나는 인형이자 사람이야.
또한 나는 라빗츠의 리더이자 발키리의 인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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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속으로 들어간 새

이름 모를 아름드리 나무 끝 가지에 위치한 작은 둥지에서 태어난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아비는 매운 향이 나는 두발 동물들에게 살해당했다. 홀로 남은 어미는 알을 품고 잠시간 눈을 붙였다가 짚으로 알을 감싸두고는 먹이를 찾았다. 옆에 있던 형제는 나무를 타고 올라온 비늘 동물에게 먹혔다. 마지막으로 태어나지 않은 작은 새의 알을 으깨기 직전, 날아온 어미와 비늘 덩물은 사투를 벌였고 승자는 없었다. 죽어가기 직전까지 알을 탐한 비늘 동물의 이는 결국 알에 상처를 냈고 어미는 그 주둥이에 달려들어 아가리를 찢어버렸다. 흠집이 난 알은 곧 산산조각나 축축하게 젖어있는 채로 작은 새는 태어났다. 차가운 둥지에는 싸늘하게 식어 굳은 핏자국이 낭자했고 죽어있는 비늘 동물과 어미를 흘긋 바라본 작은 새는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채 뜨지 못한 눈 사이로 들어오는, 눈이 시리고 아프게 반짝거리는 것을 작은 새는 보았다. 삐약- 작게 나온 첫 울음소리는 깨어난 숲의 소리에 묻혀 금세 사라졌다. 배가 고파진 작은 새는 여물지 않아 여린 발로 굳은 피 위를 걸었다. 작은 새는 부리를 열어 어미의 눈을 먹었다. 몸통을 먹어 치웠다. 깃털을 남기고 사라진 어미였다. 아직도 배가 고픈 새는 비늘 동물까지 먹어 치웠다. 비늘만 남기고 사리진 비늘동물이였다. 
 완전히 자란 새는 날개를 펼쳤다. 둥지의 끝에 선 새는 바닥 대신 부른 창공을 바라보았다. 퍼덕이는 날개 짓이 어색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발 밑엔 오로지 허공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야 보였던 창공은 발 밑에서 새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새는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처음 태어나 무방비했던 새가 눈이 아프게 보았던 것을 응시했다. 빨갛고, 노랗고, 따듯하게 타오르는 것을 쫓았다.
 그 태양속으로 새는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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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밤

우선은 다짐을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글로 다짐을 서술하진 않았다. 글로 다짐을 서술하는 순간 난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가혹하게도 분풀이는 그것으로 끝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은 확고하게 다지고 강인하게 정신을 차렸다. 맹렬한 눈길로 허공을 응시하며 이 분노에 대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출하지만 가슴 속 깊이 담았다. 다짐은 분풀이로 끝나지 않았다.
찬찬히 고민해보자, 그/그녀를 죽일 수 있는 방법.
이 내 감정은 천천히 시행하고도 싶었고, 아주 빠르게도 처치하고 싶은 강렬하지만 차갑게 식은 분노, 이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분노. 들끓는 분노에 손끝이 벌벌 떨리고 심장 속에는 어느 여자/어린아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명이 울리고 있다.
찬찬히 고민해보자. 어디서 부터 시행할지.
우선 나는 그/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는다. 그 차갑다 못해 시린 가슴을 유지하여라, 그 어떤 얼음, 추위에도 비할 수 없는, 그 어떤 뜨겁고도 활화산 같은 사람/사랑이 다가와도 녹아내리지 않는, 달아오르지 않는 시린 가슴을 유지해야 한다.
오랫동안 단련된 상처로 덕지덕지 딱지 앉은 나의 심장은 이제 눈물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그/그녀의 죽음은 나에게 아주 객관적이고도 진실한, 희망하는 사실.  그리고 이 사실에 가장 괴로워해야할 그/그녀는 설령 나의 앞에서 죽음을 받아들지 못하고 울어버린다면 그것또한 나의 다짐을 확고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두가 나에게 묻거든 그/그녀는 죽었다고 전하자. 무미건조한 발음으로, 미사어구 없는 간단한 구조의 단어. 단호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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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걔를 만나보니깐 손가락이 열개에요”

뭐랄까? 주황색 불빛에 반짝이는 동그란 어깨는 귀엽다. 어느 카페에 앉아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귀여운 어깨를 가진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지 고민해본다.

몰스킨 노트를 펼치고 라미 만년필을 들었다. ‘1’ 숫자를 쓰고 몇 분간 그 다음 글을 쓰지 못했다.
“아 키보드.. 키보드가 없으면 글이 안 나가네” 라고 작게 중얼 거리고 가방에서 ‘맥북 에어’를 꺼냈다. 전원 버튼을 넣고 고개를 들어서 천장을 바라봤다. 어깨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뭘 하면 좋을까?’ 라고 생각 했다.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메모장을 하나 열었다.
우선 ‘작은거부터 사소한거부터, 목표는 크지만 목적은 작게, 한 걸음씩 걸어 나가자’ 라고 적었다.
드디어 생각났다.
1. 귀여운 어깨를 더 빛나게 해줄 ‘달콤한 향의 록시땅 바디크림’
2. 한달치 마실 수 있는 양의 ‘피지워터’
3. 일본 원서에 한국 번역본, 대만 해적판까지 좋아하는 만화책의 다국어 버전 컬렉션 증정
4. 그녀가 잘 다니는 음식점에 미리 돈을 지불하고 어깨가 귀여운 여자가 오면 계산하지 말고 그냥 보내라고 요청.
5. 아침에 먹을 빵 한 아름 증정
6. 취향에 맞는 음악 찾아서 아이팟에 집어넣고 무심하게 선물
7. 알프스에서 입을법한 원피스 선물
8. 같은 책 읽기(유대감 형성)
9. 경제기사 소리 내서 읽어주기(내 강점 부각)
‘후으’
어머니에게 효도 한번 제대로 못 해본 내가 뭐하는 짓인지 하는 생각에 이쯤 쓰자 한숨이 나왔다.
‘아냐 아냐 저번 명절에 다들 결혼하는 게 효도라고 말했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10. 데이트 할때 어떤 영화 볼지 쉽게 결정하도록 영화 주간지 정기구독 시켜주기
11. 방에서 집중하기 쉬운 조명 사주기
12. 숙면 취하라고 양키캔들 방에 두고 가기
13. 휴대폰도 안 터지는 산에 올라 캠핑하기
14. 하고 싶은 일 생기면 적극 응원해주기
14-1. 관련 기사 스크랩해서 전해 줌
15. 일 바쁘면 신용카드 주면서 어디서 굶지 말고 밥 먹고 다니라고 말함 여기서 키포인트는 ‘없는 돈에 주는 거니깐 잘 사용해’라고 이야기하는 것
반쯤 남아있는 토마토 주스를 마시며 ‘이야 여기까지 썼는데 아직 써야할 게 더 많네 내가 미친놈인가’라고 중얼 거렸다.
혹시 모니터 너머 누가 내 글들을 보는 건 아닌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봤다.
“아 형 오셨어요!”
때마침 카페에서 보기로 한 형 두 분이 왔다.
“어 성석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네 전 잘 지내죠. 형 아메리카노죠? 제가 가지고 올게요.”
“응 그래 고마워”
형과 나는 공백기간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형 그러니깐 걔가 말은 하더라고요. 딱 문장 구조에 맞게 제 앞에서 말을 하는데 그게 진짜 좋았어요.”
“그랬어? 그래도 다른 애들도 있는데 왜..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이 말했다.
“아니야, 형 성석이 이야기 들어보니깐 거의 ‘걔를 만나보니깐 눈이 두개 있더라고요, 손가락이 열개에요! 이건 기적이에요’ 이런 거랑 지금 똑같은데요? 이건 이미 활주로 탔는데 이미 유턴도 못 해”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형이 쉽게 진단을 내렸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볼이 빨개졌다.
“아..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말은 다 하는 건데…”
“그래도 몇 년 만이다. 네가 이렇게 적극적인 건…” 앞에 앉은 형이 말했다.
“그 그죠? 저도 놀라다니깐요.”
몇 마디 대화에 다들 웃었다.
“형 얘는 지금 아무 이야기도 안 들려요. 몇 달 후에 돈 털리고 정신 황폐해지고 몸 상해야 그때 형 말이 맞았어요. 라고 말하면서 온다니깐요. 직접 경험해봐야지 모.. 형 우리도 그랬잖아요?” 옆에 앉은 형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래 형들이 나 생각하는 건 알지만… 누가 몸에 좋다고 마약하나 나쁜 거 알면서도 순간이 좋으니깐 하는 거지.. 나는 메모장의 내용을 저장하고 조용히 맥북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형 괜찮아요. 지금 제 삶은 이미 충분히 황폐하고 허무해요. 날 좋아하는지가 문제죠.”
나는 토마토 주스에 남은 얼음을 씹어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