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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다 자란 손톱이 벽을 긁었다. 다 헤진 벽지가 손톱이 지난 자리를 따라 속을 드러냈다. 보기 싫었다. 색이 바래고 곰팡이가 핀 벽지가 꼭 내가 입은 낡디 낡은 천쪼가리같아서. 벽지를 긁어내면 시멘트 벽이 드러나는 것도 얇은 천쪼가리 한 장으로 겨우 가린 내 썩어문드러진 속내인 것만 같았다.


 다 자란 손톱이 벽을 긁었다. 회색 시멘트 덩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톱 틈에 새빨간 피가 고였다. 피는 금세 굳어서 검붉게 변했다. 보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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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내가 처음 좋아하게 된....즉,내 첫사랑은 말이지 되게 재미있는 남자아이였어.
그 아이를 학원에서 처음 만났어. 아마...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엄마가 억지로 미술학원에 새로 등록 해서 처음 학원에 간 날 투덜거리며 학원에 들어갔는데 나밖에 없던거 있지? 그래서 그냥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어떻게 생겨먹은 학원인가 하고 학원 내부를 서성이며 걸어다니며 구경했어. 생긴지 좀 되었는지 낡고 쾌쾌한 시멘트 냄새와 물감 특유의 냄새 그런게 섞여났어. 미술학원이랑 피아노학원을 같이 운영하는지 피아노가 있는 방이 꽤 되었고 악보도 아주 많았어. 이것저것 시간가는줄 모르고 구경하니 언제왔는지 너가 내 뒤에 와서 아무렇지않게 내게 말을 걸었어.
"너 누구야?새로 온 애야?근데 여기서 뭐해?" 너는 편의점에 갔다온건지 과자 한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어.
난 그 아이의 물음에 놀라 엉겁결에 존댓말이 톡 튀어나왔어.말도 더듬었지. "네?!어? 아,아니 그 저 오늘부터 여기ㅠ 미술학원 다니는데 아무도 없어서..." 말끝을 흐렸어. 아직도 생각해. 이때 좀 더 말을 조리있게 또박도박 잘했으면 좋앗을걸...하고.
"미술은 저어기 방이야.나는 미술이랑 피아노 다 하는데 넌 미술만 하는 거야?" 그렇다고 대답을 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에 그 남자애는 손에 들고있던 과자봉지를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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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의 무게

01
아침부터 냇가에 나갔던 B는 점심 무렵 옷을 흠뻑 적신 채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재주로 잡았는지 양동이에는 이름 모를 작은 물고기 한 마리와 우렁이 서너 마리가 헤엄 중이었다. 우리 이걸로 뭐 해먹자. 손질할 줄 모르잖아. 라면에 넣으면 어때. 엄청 비릴걸. 아 그렇겠네. 양동이에 담긴 민물처럼 맑고 심심한 대화가 오간 뒤 B는 씻으러 샤워장에, 나는 양동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02
민박집 뒷마당을 지나 시멘트와 흙이 섞인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자 금방 시내가 나왔다. 내를 둘러싼 자갈밭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각자각 소리를 냈다. 물 앞에 송그리고 앉아 우렁이 하나를 건져 손바닥에 올려보았다. 우렁이는 혓바닥 같은 몸을 날름 내밀었다가 내 살에 닿자마자 놀라서 쏙 들어가 버렸다. 어쩌면 물 밖의 환한 햇빛에 놀란 걸지도 모른다.
03
문득 내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언제나 붐비고 졸음 가득했던 전철 안에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강은 출퇴근길의 짧은 위안이었다.
유리 벽 너머 멀리 넘실거리던 한강과 여기 부지런히 물결치는 작은 냇물. 둘 다 똑같은 강물인데, 내가 직접 보고 느끼고 있다는 것만 다르다. 
04
툭툭 털고 일어나 양동이를 쏟았다. 물고기는 얕은 곳에서 몇 번 첨벙거리다 이내 헤엄쳐 사라졌다. 정수리에 손을 올리자 따듯하게 데워진 한낮의 온도가 와 닿는다.
05
점심을 먹고 대청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었다.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넘치는 과즙이 팔을 타고 팔꿈치까지 흘러 뚝뚝 떨어졌다. 한철인 수박은 달아서 배가 부른데도 계속 손이 갔다.
하얀 속살만 남은 껍질을 치우고 끈끈해진 팔을 닦는데 B가 눈썹을 찌푸린다. 머리 울려. 귀에 물 들어간 거 아냐? B는 아이처럼 무구한 표정을 하고 날 쳐다본다. 해답을 말해주길 기대하는 얼굴이었지만 나도 아는 게 별로 없다. 고개 기울이고 있어 봐. 이런다고 나오나? 더 들어가지는 않겠지. 드라이기로 말려 볼까. 아… 우리 드라이기 안 가져왔어.
06
길어지는 낮 시간만큼 생각도 늘어간다.
나는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끝없는 결재 서류와 보고서, 업무 일지, 일을 위한 일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은, 복잡한 체계와 절차만 가득한 지겨운 페이퍼 워크, 떨어지면 얼른 채워야 했던 탕비실의 커피, 종이컵, 복사기의 인쇄용지. 그리고 막내야, 멍청아, 저 좋을 대로 버릇없이 부르던 무례한 목소리와도.
과연 이 안도는 언제까지 갈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무엇이든 한정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매일 알람이 아닌 햇살에 눈이 부셔 깨는 달콤한 아침도 곧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될 것이다.
목 아프다, 그냥 누워 있을래. 내내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B는 내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온전히 기댄 머리의 무게가 술렁이던 생각들을 누름돌처럼 지긋하게 눌렀다. 동그스름한 뒤통수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따듯한 물에 푹 잠긴 것 같은 안정감. 나에게 날을 세우거나 숨 막히게 짓누르지 않는 안전한 무게가 좋았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맴맴, 매미가 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주위의 나무들이 산들거리며 소낙비 같은 소리를 냈다.
벅찬,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