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메뉴

술잔

휘엉청 밝은 달빛이 술잔에 담기네. 차디찬 비파 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살며시 풍겨 오는 목련꽃 향기가 다시금 너를 기억나게 만든다. 내 잠시나마 너를 잊으려 하였거늘, 어찌 너의 모든 부분 중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없단 말인가. 

현을 튕기는 소리가 가슴을 두드린다. 달과 목련꽃 가지가 비치는 술잔을 들고. 달을 마시는 신선이 되었다 여기며 너를 마음에 품은 채 술을 입에 넣고는

어찌하여 이리도 쓴 것인가, 하고 되새겨 보니 곁에도 없는 너를 생각하여 그런 것이다 여겼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술잔을 입에 대니 이번에는 왜 이리 단 것인가, 하고 연유를 찾으니 나에게 기쁨을 주는 너를 마음에 품어 그리한 것이다, 라고 여겼다. 

어찌하여 너는 나의 곁에 없음에도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가. 어떻게 너는 내가 너만을 생각하게 만드는가. 도통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내가 너를 생각할 때와 너를 볼 때가 내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시간이란 것이다.

나는 오늘 밤도 너를 생각하며 잔을 입에 댄다.


이지 지음



다른 글들
0 0

너가 미치도록 보고싶은 날

네가 보고싶지 않아,
아주 가뿐하고 기분이 좋은걸 
이제 더이상 아프지도 않아
그리움에 밤새며 술잔을 드는 일도 없어졌어
2 0

다정함

텍스트로는 다정함을 느낄 순 없지.
통화만으로도 다정함을 느낄 순 없고.
때론 같이 한 상에서 수저를 들고 술잔을 기울여도 다정함을 못느낀단 말야.
참으로 다정함은
 다정한 눈과 다정한 눈의 마주함에서 오는 것이다.
3 0

감정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는 조심히 칼을 꺼냈다. 그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그녀는 더 울었다. 눈물이 그저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칼로 그 남자를 겨눌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그녀였다.
"아....."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입에서는 가느다랗게 탄식이 흘러 나왔다.
"무엇을 망설이는 건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나, 나는....."
"그래, 이대로 너에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그는 그저 옅게 웃었다. 물론 당대 최고의 무신인 그가, 고작해야 고아 소녀의 칼질 몇 번에 목숨을 잃을 리는 만무했다. 허나 그는, 자신 앞의 소녀가 원한다면 그래주고 싶었다. 그것이 연정이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언제 피어난 건지도 모를 단 하나의 작디 작은 감정이, 어느 감정보다도 더 그를 움직였다. 여태까지 이랬던 적이 없기에, 그는 궁금해졌다. 연정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리도 나를 움직이는가. 이래선 안 되는데, 점점 충동이 그의 몸을 감쌌다.
".....!"
결국 충동이 이성을 이겼다. 그가 달려가 그녀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그녀가 너무 놀라 헛숨을 삼켰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더 세게 끌어안기만 했다. 소녀의 손에서 칼이,
투우욱
떨어졌다. 소녀의 손이 올라갔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껴안았다.
"...미안하다."
그가 보니 그 여린 소녀는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숨죽여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 여린 아이가 흐느끼는 이유가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기에 마음이 아파서 그는 사과했다. 끌어안은 손은 누구도 놓지 않은 상태였다. 
"..흑..으흑..."
그 소녀의 흐느낌이 자신의 마음을 후벼 팠다. 적군에게 팔이 잘리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탄식을 삼켰다. 눈이 내리던 날. 외로웠던 무신과 곁에 아무도 없었던 소녀는 서로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다.
이지 지음
0 0

안녕...../무대

내가 기억하던 너. 너는 내게 마치 아름다운 유리구슬 같은 사람이었어.
곁에 있고 싶고, 깨질까봐 불안하고, 보호해 주어야만 할 듯한.
근데 넌 사실 그게 아니더라.
실은 보호해 주지 않아도 되고, 실은 곁에 있을 필요가 없고, 실은 깨지지 않고.
그래서 조금, 놀랐어.  내가 알던 너와 진짜 너가 달라서.
그냥 놀라는 정도로만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이게 아니야. 너는 변했고, 내가 놀라는 정도로만 끝나지 않았고, 그래서 넌 행복해졌지. 그래. 놀라는 정도로만 끝나지 않아서 너가 행복하니 됐어. 어쨌거나 넌 변했고, 내 곁을 떠났지. 그래서 넌 행복해졌어. 그래, 그럼 된 거야. 너만 해피엔딩이면, 주인공인 너만 해피엔딩이면 나머지 주조연들도 전부 행복해지니까. 난 네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조연도 아니었던 듯싶기도 하지만, 난 그저 관객이었던 듯싶기도 하지만 됐어. 무대 위 주인공이 행복해지는 모습은, 바라만 봐도 행복하니까.
안녕.
이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