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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k <Thomas Charters / Unsplash>

시간

주름진 노인에게 흘러가는 시간은 너무 아깝다.

가지말라 잡고 싶지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야속하구려.


저 주름진 이마는 어떤사연이 담겨 있을까.

거칠어진 손에는 가장이라는 짐과 또 어떤 짐을

손에 꽉 쥐고 왔을까.


감히 짐작할수도 없음이라.


어디서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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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도

론도 [ ronde ] 
① 원무곡을 가리키며, 원무 또는 그 노래를 이르는 말이다. 둥근 원을 만들어 춤추면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② 하나의 주제가 다른 여러 개의 주제와 섞여서 등장하는 특징을 가진 악곡 형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론도가 울린다.느리게 빠르게 낮게 높게,그는 노래를 듣는다.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여인들의 상아빛 팔들이 하늘로 향했다가 원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가없는 사랑을 주었건만,내겐 당신이 전부였건만.여인들의 찟어질듯한 소프라노가 울린다.
내게 배신의 칼날이 되어 돌아오네,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왕자다운 몸짓으로, 품위를 잃지않는 귀족다운 동작으로.
그는 여인들의 창백한 젖무덤 위, 깨진 알조각처럼 흩어진 진주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 모든일들이 벌어진 까닭에 대해 생각한다.다시 고개를 저으며
그는 시트를 발로 밀쳐내고 일어나 앉는다. 땀으로 흠뻑 젖은 등을 침대헤드에 기댄채 숨을 몰아쉰다.
창백한 오른손이 덜덜 떨리지만 힘겨운 동작으로 주름진 이마를 문지른다.'말도안되는 꿈이야'이를 악문다.
눈살을 찌푸린후 침대에서 일어난다. 걱정했던것과 달리 그의 무릎은 떨림 하나 없이 멀쩡히 움직인다.'이것봐 내가 말도 안된다고 했지'
그는 침대 정면에 있는 시디장에서 제목도 보지않고 막무가내로 시디를 뽑은뒤 플레이어에 넣는다.
재생을 누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차분한 바이올린 소나타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는 한숨을 쉬며 방문을 나선다.
부엌에 있는 스테인레스 싱크대 위로 커피메이커를 돌리고나서야 쉼없이 솟아나오는 불안감이 가라앉는다.
그의 집은 무엇이든 누르고 입력해야 작동이 된다. 그의 집에 놀러온 친구들은 몸서리를 치며 못말리는 아날로그맨이라며 야유한다.
개자식들 뭐든 직접하는게 최고인것도 모르고, 버튼하나 눌러서 미사일이나 쏴재끼는 새끼들이...
커피메이커에서 흐린 아메리카노가 주르륵 떨어진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머그컵에 설탕을 붓는다.
침대를 정리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서자 기묘한 리듬으로 바이올린이 울부짓는다. 악마의 트릴. 그는 어색하게 웃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웃어야 하는법,난 아무렇지 않아요 아빠.
그는 머그컵을 침대 옆 탁자에 올려두고 무릎을 꿇은뒤 기도하기 시작한다.
항상 마음속으로 기도하지만 그걸로 부족할때가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바닥에 무릎을 댄채 하느님 아버지에게 기도를 바친다.
마치 그래야 무심한 아버지가 관심을 줄것이라 기대하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평생 아버지의 자식이길 바라면서.
한번도 기적을 보지 못한 미물 주제에, 그는 다시 짙게 미소짓는다.
남자들은 말한다.(어쩌면 여자들도 함께 말한다)어찌하다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인 네가!
민족들을 쳐부수던 네가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다니!(루시퍼 모닝스타와 함께 했지만,내동댕이 쳐졌기 보다는 넘어지고 구른것이 적당했다.)
너는 네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지.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쪽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지리라'(그래도 이또한 계획의 일부였을테지)
그런데 너는 저승으로, 구렁의 맨 밑바닥으로 떨여졌구나. (저승이라면 저승이 맞다,인간들 틈사이에서 카트를 밀고갈때면 내가 이 생지옥에서 뭘하고있는건지 회의감이 들곤 하니까.사랑스러운 이승이여) 원대한 계획의 일부,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침대시트를 정리한다. 깔끔하게 하얀 이불을 펼친후에야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켠다.
그러나 모두들 왜 신의 타락한 자식은 아들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아들의 적수는 아들이여야 하기 때문에?
아담의 첫째부인은 못된 쌍년이였고, 둘째부인은 없는것도 있는것도 아니게 됬고, 셋째부인은 과일을 먹고 낙원에서 내쫏겼다.
자신의 의지로 과일을 먹었다기 보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어리숙한 낙원소녀, 그는,그러나 그녀는 힘없이 미소짓는다.
내가 그들을 이끌었다고,자신의 발로 낙원을 떠나게했다고, 아버지를 배신하게 했다고 말하지않는다. 그 말과 생각또한 계획의 일부일테니.
(이제)그녀는 눈부신 금발을 천천히 땋아 머리위로 틀어올린다. 어린 금발머리는 자라면서 갈색으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아직 다 자라지 못했다. 어쩌면 머리타래가 갈색으로 변할일이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우주가 끝장날때까지.
맵시있는 회색 스커트를 입은채 또각거리며 엘레베이터로 다가간다. 버튼을 누른채 그녀를 기다리고있던 남자는 어색하게 웃는다.
'고마워요'그 목소리,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오는 목소리에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아침인사를 건낸다.
그녀는 시계를 고쳐메며 남자의 요동치는 목울대를 쳐다보고 그의 욕망을 듣는다. 원한다면 가질수도 있다. 이브를 가졌을때처럼 손쉽게.
대신 그녀는 25살짜리 인간 처녀처럼 미소지은채 입술을 열지 않는다. 그를 취하고싶은 마음이 들지않는다.
이건 좋지않은 징조다. 타락천사도 우울증에 걸리냐고 묻는다면,그렇다고 대답해주겠다. 그녀는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당에가서 축복받은 은십자가를 목에걸고 목사에게 참회하며 눈물을 떨구는 타천사. 전혀 농담이 아니다. 이미 몇세기동안 그래 왔으니까.
다만 그 눈물이, 양파를 자를때 솟아나오는 눈물 같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게 문제겠지만, 어쨋든 기분은 나아진다. 그리고 또다시 살아가는거다, 천사들을 위해,모든 선한 영혼들을 위해 악마를 보여주고 믿음을 준후 아버지에게 매달리게한다.
빙의는 피곤한 일이며, 축복받은 성수에 살갗을 태우는 일은 더 피곤한 일이다. 칼로리가 남아나질 않는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엘레베이터가 멈추자. 그녀는 사무실로 들어선다.비서실로 들어서서 스카프를 풀어놓고 의자에 앉은채 컴퓨터 본체 전원을 넣는다.
지금 당장은 인간의 일을 할 시간이다. 그리고 성당에 간다음 우울증을 떨쳐낸후 팝콘을 들고 메린신부를 찼아가서 악마들린 소녀들과 싸우도록 해야겠다.
'하우스양' 상사의 인사에 그녀는 문득 고개들고 대답한다.'안녕하세요,사장님'
흐린 회색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상사에게 그녀는 선한 눈동자로 미소짓는다.
그는 소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그와 비서가 관계된 가십거리에 대해서는 촉을 곤두세우고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휘하 직원들을 감시한다.
문란한 사생활을 경멸하며, 그 점에대해 그녀에게 분명하게 경고했다. 루시는 그가 마음에 들지만 유혹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가 감당할수있는 타락은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이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 머리속으로 궁리해본다
'오전 스케줄은 회의를 위해 비워놨습니다. 사장님' 지옥불을 유지시키기 위해 기름으로 가득찬 장작이 되거나.
'내 책상위에 올려둔 피지워터는 뭐지?''샐러드도 함께 올려놨습니다.'악마들을 위한 놀이감이 되겠지. 역겨운 악마놈들.
그녀는 진저리치도록 악마들을 혐오한다. 타락천사들을 향한 악마들의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지옥의 다정한 주민들은 서로를 드잡이질하는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분노와 타락과 배신이 맥박치는 심장을 가지고있어서? 천만에 그게 우리들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장이 눈살을 찌푸리자.그녀는 순진하게 미소짓는다. 사장님이 이혼하셨고,아침식사를 거르고 회사에 나오시는걸 알고있어요.
그런데 이건 작업이 아니거든요, 비서로써 할일을 하는것 뿐이에요, 그런의미의 미소를. 그러나 끝내 그녀는 침묵한다.
사장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불만스럽게 말한다.
'...다음부턴 시키지도 않은일로 시간낭비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예'
'저따위 일을 하라고 자네 월급이 나가는건 아니니까 그점 똑똑히 알고있으라고.'
'명심하겠습니다.'
냉혹한 상사의 말에 그녀는 멀쩡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미소에 그는 더욱더 눈살을 찡그리고 짜증섞인 동작으로 사무실로 들어간다.
닫힌 문 너머에서 샐러드와 피지워터 병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저런 불쌍한 녀석, 딱하기도 하지. 그녀는 실로 천사다운 동정심이 솟아나는것을 느끼며 그의 동작을 '듣는다.'
남자는 한점의 후회나 머뭇거림도 없이 쓰레기통의 뚜껑을 닫고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한숨을 내쉰후 책상위 액자를 노려보고 다시 한숨을 쉰다.
그의 마음속을 맡고싶지만, 그러기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있다. 지금으로써는 짐작하고(대부분 정확히 들어맞는다) 악마의 눈으로 그의 행동을 예상할 뿐이다.
그녀의 상사는 악마같은 남자다. 업무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냉혹하고 잔인한 남자.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단단한 단면만 있는것이 아니다. 세월의 풍파를 모질게 겪어서 두 손과 발이 거칠어져도, 사람의 몸 어딘가는 말랑하고 연약한 부분이 남는다. 마음도 똑같다.
그녀는 그녀의 상사가 최근 겪고있는 이혼소송에 대해 생각한다. 사업적 결합을 위한 정략결혼이였어도 밤새 침대 옆자리에서 숨쉬던 여자가 사라지자 그는 담요잃은 아이가 되어버렸다.
불쌍한 녀석, 하지만 악마같은 너의 곁에는 진짜 악마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 네 마음속의 하느님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테니까.
그녀는 경쾌하게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선선한 봄날씨에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간다. 가로수들마다 푸릇한 새잎을 내밀고 봄꽃들이 공원잔디밭에 솟아난다.
그녀는 기꺼이 미소지으며 12층 비서들과 함께 회사 로비를 나선다. 그녀의 피부는 투명하게 빛난다.아침햇살에 녹아버리는 눈도깨비처럼
그녀들 모두 어깨에 디올백을 걸치고 샤넬구두를 신은채 봄볕에 피부가 그을리는것을 염려해 황급히 도시의 그늘에 몸을 내맡긴다. 그리고 비싼 유기농 샌드위치를 먹기위해 두블럭을 걸어가서 레스토랑의 푸른 차양아래 자리를 잡는다.
그녀는 웨이터를 불러 염소젓 샐러드와 작은 샌드위치를 하나 시킨뒤 어린 인간처녀들의 재잘거림을 즐겁게 듣는다.
그리곤 여자들의 수다가 그녀가 달가워 하지 않는 곳으로 흐르는걸 느끼며 입가를 경직시킨다.
'악마같은 무언가에 시달린 적 있어요?'
악마에 대해 말하는 작은머리가,그 빨간머리가 후광처럼 보인다.
'내 소가죽가방에 어떤 찌질이가 콜라를 엎었을때?'
다행히 그녀옆에 다른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그런거 말고요'
'백화점 세일이 끝났을때,이건 내가 작년 겨울에 겪었어'
'의사가 더이상 내 진료차트에 수술일정을 추가해줄수 없다고 할때'
'내 남자친구가 약혼반지를 꺼낼때'
'그건 신의 계시나 마찬가지야,머리위에 울리는 종소리를 들은적 없어?'
'그 새끼를 만나고 되는일이 없어, 내 고양이 지지를 내쫒으려한놈이 그놈이라고'
'아, 안됐다. 그래서?'
'반지는 받았지만,곧 전화로 헤어졌지.'
'약혼반지는 어떻게 했는데?'
'팔았어,당연하잖아'
여자가 변명하며 다시 말한다.
'백금반지였다고,'
그쯤 말하자 한두명씩 전 남자친구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빨간머리에게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준다
'잠을 설쳤어?'
'아..네..'
빨간머리는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그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악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상냥하게 속삭인다.
'악몽이라도 꾼거야?'
'...예...좀..'
'무슨꿈이였는데?'
'..그냥..좀...'
빨간머리는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탄산수가 들어간 병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거기 뭐라도 빠졌냐고 묻고싶은것을 참으며 그녀는 미소짓는다.
빨간머리, 수습사원 발레리는 그녀를 불편해한다. 발레리는 회사 복도에서 그녀와 마주치면 사냥개를 본 토끼처럼 몸을 바짝 숙인채 그녀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그리고 가끔 눈이라도 마주칠때면 그녀의 눈은 마치 자연재해를 바라보는 허리케인 수해자와 닮아있다.
그 원인을 알수없는 기피에 함께 몰려다니는 비서들도 발레리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그리고 묻는다. 그녀가 네 남자친구를 빼앗기라도 한거야? 미인 알러지라도 있는거야?
하지만 발레리는 입도 벙긋하지않는다. 그게 아니라는 입발린 변명도. 불편하다거나,무섭다거나,싫어한다거나 하는 아무런 말도없이.
발레리의 내려깐 눈꺼플을 보며 그녀는 미안함을 느낀다. 이렇게 불편하게 마주 앉는것이 아니였는데. 씁쓸함을 느끼며 물잔에 반사되는 햇빛을 차분히 응시한다.
주문한 샐러드가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그것을 멈추고 포크를 쥐어든다.
'루시는 지금 남자친구없어?'
불쑥 튀어나오는 물음에 놀라는 기색없이 준비된 대사를 읆듯 대답한다.
'없어요'
'전 남자친구는?'
'있었죠'
'어떤 남자 였는데?'
그녀는 샐러드를 한입먹고 대답한다
'궁금해요?'
'다들 그 얘기중인데 루시만 아무말도 안하고있잖아.말해봐'
나만? 그녀는 발레리를 흘긋 쳐다본다. 그 시선에 아이보리색 귀가 발갛게 물든다.
경험없는 숫처녀라, 악마들이 환장하는 VIP상품이로군, 그녀는 경쾌하게 웃는다.
'좋은남자요'
'좋은남자?그런데 왜 헤어졌어?'
'헤어지긴했지만 아직 친구로 지내요.'
'친구로 지낸다고??'
여자들의 눈이 수상한 빛을 내며 가늘어진다.그녀는 순수한 미소를 짓는다.
'예,좋은사람이에요'
그 말에 여자들의 얼굴에 샐샐거리는 웃음이 번진다. 루시가 자신의 금발머리가 염색이 아니라고 말 했을때와 똑같은 미소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없는거야? 좋은남자를 아직도 친구로 만나고있어서??'
'맞아요,그리고 그는 질투가 많거든요'
'맙소사,그럼 아직도 그와 사귀는거잖아!'
'그런가요?'
'좋은친구로 지낸다며, 그러면..음..가끔 외로우면 서로 토닥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
'장난스러운 토닥임 말이지?아 그거 좋지,개자식들'
루시는 싱긋 미소짓는다.
'외로울때 오는 전화 말이에요?'
'맞아 그거,어땟어?'
여자의 눈이 음탕하게 빛난다. 루시는 그 눈빛을 맛보며 몸서리 친다.
'그런적 없어요'
'말도안되,거짓말하지마'
'정말이에요'
'안 믿을꺼야,그럴순 없지'
금발 미녀들은 엉덩이가 가벼워 보이는법,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수긍한다.
그리고 기억을 되짚어본다. 루시와 사이파,이 사이좋은 타천사 한쌍은 반세기동안 손도 잡은적이 없다. 사실 그이상 진도를 나가본적도없지.
경험없는 숫처녀가 여기 또 있군, 그녀는 담담하게 반론을 제기한다.첫남자친구와 첫경험을 해야한다는 법이 있다면, 난 숫처녀가 맞다.
장난스러운 토닥임과 들썩거림은 약과 환각에 취한채 두번째 남자친구와 충분히 치뤘다.그덕에 좋은 경험도 얻었고, 첫 남자친구의 화난얼굴도 봤다.
그러나 그가 아직도 내 남자일수는 없다. 아니...아닌가?
그녀는 앞에 앉은 발레리가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는것을 알아차린다. 그 시선속에는 약간이 공포와 약간의 경외심이 섞여있다.
빨간머리의 발레리는 고등학교때 금발 치어리더의 측근이였거나. 배경중 하나였던걸까
그녀는 천사다운 안쓰러움을 느끼며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척한다.
덕분에 점심시간 내내 오른쪽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사소한 엄무들을 처리한후, 그녀는 하이힐을 신은채 복사실앞에 서 있는다.그안에서 여러가지 냄새들을 본다,그리고 듣는다.
A4종이의 바스락거리는 떨림, 옅은 소독약 빛깔과 잉크소리, 뒤섞인 쥐오줌 색깔, 천장 벽을 가로지르는 거미의 발자국 냄새
잔업후 삐걱거리는 몸으로 스타킹을 내린채 직장동료의 몸을 맞댄 살냄새.그녀는 피식 미소짓는다.
팩스를 보내려하자 잉크 카트리지가 부족하다는 빛이 깜박거린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혀 서랍을 뒤진다.
복사실을 지나치려던 사원 하나가 그녀의 긴장된 종아리와 팽팽한 엉덩이를 감상하며 천천히 말한다.
'뭐 찾으시죠?'
그녀는 깜짝 놀란것 처럼 어깨를 움찔거리고 반톤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언제 들어오셨어요?아, 놀래라'
'죄송해요,하지만 문앞에서 헛기침을 했는데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앙큼한 거짓말쟁이같으니,네 들뜬 기분이 느껴지는걸? 남자의 눈에는 그저 미안함으로 어쩔줄몰라하는 당황한 여자가 보인다.
'미안해요, 잉크 카트리지를 찾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네요'
'그거 여기 있어요'
남자는 팩스기를 보고나서 협탁을 뒤적거려 노란 카트리지를 꺼낸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팩스기에 카트리지를 교환해서 끼우고나서 그녀를 돌아본다.
루시는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고마워요'
'뭘요, 제이름은 주드에요,주드 그로우닝'
'전 루시 하우스에요'
'아,사장님 비서시군요?그러고보니 회사내에서 한번도 마주친적이 없네요'
'그렇네요,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로우닝씨'
그녀는 의연한동작으로 팩스기로 다가간다.그러나 남자는 비켜서지 않고 미소짓는다.
'오늘 처음봤지만 왠지 익숙한데요?혹시 어디 살아요?'
천국에, 그러나 지금은 지옥에 살고있지. 찾아오려면 고생꽤나 할꺼야.
'천국에 사나요?'
그 작업멘트에 그녀는 웃을수가 없다. 난처한 미소조차도.
'뉴욕이요'
'오 세상에? 여기가 뉴욕인데요? 여기 집값이 얼마나 비싼데요?'
'지금 농담하시는거에요?'
'아뇨 진심으로요,우리 회사가 월급이 좀 많긴하지만 그 정도였나요?'
'저에겐 회사 월급말고도 인맥이라는 월급이 또 있답니다.'
그녀의 발랄한 어조에 남자는 주춤하고 천박한 상상을 하며 금발머리카락이 구불진 목덜미를 쳐다본다.
'어...그래요?'
어눌한 말을 중얼거리며 남자가 팩스기에 몸을 기댄다. 그녀는 짓굿은 미소를 짓는다.
'저에게 난감한 상상을 하고 계신가봐요?'
'솔직히 그래요'
'미안하지만 제 인맥은 좁고 맑으니까 그만하시죠'
'좁고..맑다고요?'
'정말, 비켜요. 그로우닝씨'
'내 성이 좀 발음하기 힘들지 않나요?'
'그래서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한다. 어느새 두눈이 그녀의 상아빛 얼굴을 감상하듯 흔들린다.
꾸밈없이 그 눈빛을 보이며 남자가 웃는다. 솔직한 미소, 우리 섹스나 한번 할래요? 그 목소리가 남자의 목안에서 요동친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는다.
'이름으로 불러요,이름으로'
'생각을 좀 해봐야 겠는데요'
'루시양, 생각은 부질없어요,인생은 짧으니까'
'제 상사가 초시계를 들고있어요,팩스를 보내야 한다구요'
'이름으로 불러요'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인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귓바퀴를 혀로 굴릴듯 숨을 몰아쉰다.
그녀는 남자의 욕망을 잡아당기고 느슨히 쥐길 반복한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다.
'글쎄요..금요일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 하는게 어때요?'
'좋아요'
마치 그말을 기다렸다는듯 남자가 황급히 대답한다. 그리고 또한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내가 왜 이러지?
'고마워요 그로우닝씨,이제 가봐요'
'좋아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어색한 걸음걸이로 복사실을 나간다. 그에게 여분의 속옷이 있다면 좋을텐데,그녀는 팩스번호를 누르며 생각한다.
팩스를 보내는 종이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끝에는 그녀의 상사가 전화를 받고 그녀의 실적에 대해 평가한다. 타락과 불행, 저주와 죽음.
본업과 회사일을 병행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 약간의 잔꾀를 부리고있다. 외줄에 올라가있는 누군가를 손가락 하나로 밀치는것은 쉽다. 그렇게 밀쳐지고 또 밀쳐지다보면 외줄따위 볼품없는 장기에 지나지 않게된다. 선(善)의 길은 너무나 정직하고 순결해서, 소량의 악의를 섞기만 해도 금방 오염되어 버린다. 외줄 아래로 떨어진 인간은 최후엔 모두 연옥의 곁으로 온다. 그녀는 팩스기의 신호가 가는것을 느끼며 생각을 멈춘다.
딸칵, 수화기가 들어올려진다. 
루시는 타조 가죽 가방을 들고 사장에게 인사를 한뒤 엘레베이터에 탄다. 엘레베이터안에는 그녀와 남자 둘뿐이다.
세속적인 분위기의 사내는 불길한 붉은머리를 아무렇게나 어깨위로 흘려놓고 색소가 옅은 눈동자로 그녀를 흘겨본다.
10층정도를 내려가고 나서야 그가 참을수없다는듯 엘레베이터의 정지버튼을 누른다.
덜컹하고 엘레베이터가 멈추자 루시가 cctv를 응시한다. 붉은 녹화 불빛이 꺼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입을연다.
'안녕'
'응'
'잘 지냈어?'
루시는 대답대신 그 남자의눈을 마주본다.
'모라이아이들이 널 찼았어'
'알아'
'왜 아직도 주군께 돌아가지 않은거야?'
'할일이 있어'
'이곳에서 무슨할일?더럽고 냄새나는 인간들 틈에서?'
'빈정거리지마.네가 나한테 할말은 아니라고생각하는데'
'난 그럴자격 충분해'
'아니,안 충분해'
'사이파'
'루시'
그녀는 한숨을 쉰다.
'제발 말도 안되는걸로 고집피우지마'
'내가 뭘 했다고?'
'제발 주군께 돌아가'
'왜? 네가 곤란해?'
'그래,곤란해'
사이파는 입술을 깨물고 피식 미소짓는다.
'그럼 더 곤란해 해'
'결국엔 그게 네게로 돌아가게 되있어'
'뭐가? 네가 돌아온다고?'
루시는 싱긋 웃는다.
'너하고 난 끝난지 오래야.'
'왜?'
'얘기가 그렇게 됬으니까'
'그런거야?'
'그런거야,넌 주군께 벌 받을꺼야'
'그렇지않아'
'넌 무저갱에서 1억년은 묶여봐야 정신차릴꺼라고...'
'주군께서 그러셨어?'
'아마 그러시겠지.'
사이파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하니 돌린다. 그는 널직한 등을 엘레베이터벽에 기대고 한참을 침묵한다.
루시는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까치발로 그에게 기댄채 사내의 턱에 입을 맞춘다. 그제야 사이파가 눈을 감은채 고개를 숙인다.
루시는 그의 입술에 스치듯 키스한채 떨어져 나간다. 사이파는 아쉬운 한숨을 내쉰다.
'왜 아직 여기있는거야 사이파?'
도돌이표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일이 있어.'
'무슨일?'
'말하기 곤란해'
'왜?'
'말하긴 곤란하지만...주군께 이득이 되는 일이야'
'그걸 네가 결정할순없어. 네가 결정할일이아니라고, 사이파'
'난, 도구가, 아니야.'그렇게 말하는 사이파의 눈은 번들거린다.
그리고 덧붙인다. '내가 알아서 잘 하고 있다고. 루시'
루시가 칼로 그어버리듯 단호히 말한다.
'넌 도구야 사이파. 우리 모두는 그저 날개달린 주구야.'
'나는...'
루시는 사이파의 꾹 닫힌 눈을 응시한다.
사이파는 눈을 감은채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외로울때 전화가 필요하지 않아?'
'....갑자기 무슨말이야?'
'장난스러운 토닥임 말이야.'
루시가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뜬다
'...엿들었어?'
'그냥 지나가다 들었어.필요없어? 있어?'
'엿듣다니..그게 무슨짓이야?'
'필요없어?'
루시는 사이파를 응시한다. 그는 살며시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본다.
사이파가 소근거리자 그녀는 그에게 한발자국 다가간다.
'뭐라고?'
'우린 친구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래?'
'아닌것같아?'
'아닌것같아서 그래'
사이파는 그녀에게 한발자국씩 다가온다.
루시는 고개를 한껏 위로 든채 사이파를 마주본다.
'네가 아닌것같다면-'
'아닌게 맞아'
그녀는 cctv를 쳐다봤다가 발밑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보인다.
'그래, 필요해,사이파'
'알고있었어,루시'
그가 루시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린다. 곧이어 짙은 청금색날개가 시야에 가득찬다.
1 1

관찰일기下

 가족 중 누구도 병원 신세를 길게 져 본 적은 없었다. 그 최초가 H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동안 H를 거의 포기하고 내버려 두었던 부모님은 자신들의 방치에 어떤 책임을 느낀 것 같았다. 이 지경까지 온 게 자신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자책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집에서 늘 하던 부업을 미룬 채 오로지 간호에 매달렸다. 아빠도 되는 데까지 휴가를 쓰고 되도록 병원에 붙어 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난 뒤 H를 보러 갔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일상을 반복하는 며칠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류는 조금씩 달라졌다. 늘 나에게 치우쳐져 있던 관심이 균형을 맞추듯 H에게로 흘러갔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곧 불균형이 될 거라는 걸 멍청하게도 그때는 몰랐다.
 “H. 안 심심해?”
 “…….” 
 “야, 대답 좀 해 봐.”
 아픈 H는 생소했다. 말 걸어도 대꾸 하나 없고, 밥 먹고 볼일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뇌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랬는데… 약간의 의구심과 불안감은 가볍게 증발했다. 아프니까 그렇겠지. 다 낫기만 하면 평소처럼 돌아오겠지. 간이침대에 엎드려 문제집을 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며칠째 백지만 넘기고 있는 관찰 일기에도 쓸 거리가 생길 거라고.

 H가 퇴원한 주말, 집에서도 내내 자던 녀석은 갑자기 한밤중에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책을 읽다가 놀라서 급하게 H를 붙잡았다.

 “너 어디 가.” 
 “산책.” 
 “이 시간에?” 
 “답답해서… 계속 병원에만 있었잖아.”
 부모님이 있는 침실을 흘끔 내다봤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이거 말려봤자 안 듣겠지. 하는 수 없이 얇은 재킷을 걸치고 나도 따라나섰다. 사람들이 잠들었을 시간. 까만 밤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H는 번화가 정 반대편, 산이 깊고 길이 외진 쪽을 향해 걸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하염없이 나아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헛헛해 보였다. 쟤가 저렇게 가벼워 보인 적이 있었나.

 H, 어디까지 갈 거야. 내내 돌아보지 않던 녀석은 내 물음에 걸음을 멈췄다. 전철이 지나다니는 굴다리 안이었다. 근처의 개천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비린내와 함께 개구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짐작하기에는 수백 마리 같은 울음이 바글거렸다. 

 “……형.”

 평생에 걸쳐 H가 형이라고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H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조용해.”
 “뭐?”
 H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전철이 세찬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갔다. 거대한 소음이 계속해서 말하는 H의 목소리를 덮고 귓속을 가득 채워 몸을 뒤흔들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전철이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겨우 말 끝자락을 붙잡을 수 있었다.
 “…벌레 떼처럼 들끓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문득 선뜩한 공포감이 신물처럼 차올랐다. 마주친 H의 눈이 너무도 낯선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조용해서…”
 “…….”
 “귀가 멀어버린 것 같아.”
 H는 바스라기 같은 웃음을 피웠다. 언제나 드세게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처럼.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날 밤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H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교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제시간에 학교를 왔다.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책에 필기라는 걸 했다. 부모님, 선생님, 반 아이들, 너나없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그리고 좋아했다. 이제 좀 살겠구나. H에 관한 일이라면 늘 비이성적으로 변했던 모든 곳에 평화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 평화는 내게 곧 불행이었다.

 “너 머리 병원에서 다시 검사받아보자.”
 “나 멀쩡해.” 
 “아니야, 뭔가 이상이 있어. 미친 것 같다고.”
 “…미친 건 형 아니야? 헛소리 그만해.”
 저벅저벅 자리로 돌아가 얌전히 책을 펼치는 H를 보며 머리를 잡아 뜯었다. 저게 뭐야. 겉가죽 외에는 비슷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저게 어떻게 H야. 내가 부정하거나 말거나 현실은 점점 확고하게 못 박혀 갔다. 갱생한 H, 정신 차린 H. 모두 기뻐하는데 나만 화가 났다. 하루아침에 무미건조해진 생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손을 놓고 수업을 듣다 보면 학교에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고는 했다.

 혼란스러운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악몽을 꿨다. 놈의 안에 있다고 믿었던 악마가 내게로 찾아온 것 같았다. 온갖 짐승에게 물어뜯기고, 절벽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삼지창에 쉴 새 없이 몸이 찔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겨우 잠에서 깨면 불면의 시작이었다. 새파란 새벽을 타는듯한 머리로 새까맣게 지새웠다.

 잠을 못 자는 날이 늘어갈수록 성격도 뾰족해졌다. 날카롭게 갈린 신경이 스스로를 찌를 때마다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몸은 점점 말라가고, 성적은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사사건건 예민하게 굴자 친구들도 떨어져 나갔다. 안에서 자라난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는 내가 울컥할 때마다 끓어오르기도 했다. H가 말하던 끓는 상태라는 게 이런 걸까.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듯한 막막함이 명치께 가득 쌓여갔다.

 “…너 때문이야.”

 무작정 방에 들어와 돌을 던졌다. H는 나를 흘끔 쳐다봤다가 이내 풀던 문제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나 때문인데. 사각사각 종이 위를 스치는 연필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너 때문에 여기가 지옥이 됐어. 잠깐의 정적 사이로 바깥의 소음이 끼어들었다.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 엄마와 아빠의 듣기 싫은 웃음소리. 나를 깡그리 무시한 채 홀로 평온한 녀석을 보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H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잘됐네.” 
 “…….” 
 “축하해.”

 빈틈없이 꾹꾹 눌러온 화가 결국 터졌다. 구석에 박혀 있던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맞아서 이렇게 됐으니, 한 번 더 맞으면 예전으로 돌아갈 거야. 근거 없는 확신이 악의와 뒤섞여 근육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팔을 휘두르자마자 터진 H의 짧은 비명과 함께 놀란 부모님이 달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벼락같은 호통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엄마가 H를 감싸 안고,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힘이 풀려 놓친 배트가 떨어지며 발등을 찍었다. 쓰러지듯 주저앉아 올려다본 H의 눈가에는 뜻밖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엄마 형이, 형이… 난 가만히 있었는데…….”

 엄마는 끔찍하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점점 거세지는 도리질 끝에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대체 왜 그래, 왜! 지긋지긋해, 이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이번엔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픈 발등도 잊을 만큼 황황해 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웃음이 터졌다. 그들이 나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았지만 웃음은 발작처럼 그치지 않았다. 조악한 연극 세트를 보는 것 같았다.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H도, 경멸 섞인 눈동자가 H가 아닌 내게 향해 있는 이 상황도. 견고하게 쌓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발밑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는 쟤가 안 이상해?” 
 “…….”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아빠가 뭐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곧장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 자식이, 이거 당장 열지 못해? 쫓아온 아빠가 문을 덜컥거리며 소리쳤다. 엄마가 창고에서 방문 열쇠를 찾아오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도망쳐야 했다. 책가방 안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 버리고, 책장 깊숙한 곳에 숨겨뒀던 관찰 일기를 쓸어 담은 뒤 책상 위 아빠의 라이터와 지갑을 훔쳐 창문으로 달아났다.

 한참 뛰어서 온 곳이 겨우 학교였다. 이제 다 자랐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어디 멀리 가본 적도 없는 어리숙한 중학생에 불과했다. 아무도 없는 학교 가장자리를 뱅뱅 돌다가 운동장 구석에 앉아 일기를 꺼냈다. 어설프게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고 또 끅끅 웃었다. 인생 최초의 절망이라는 게 H의 갱생이라니. 우스웠으나 이번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H는 구제 불능이었다. 제멋대로 사고를 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빽빽 소리를 질렀다.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결국 차례차례 H를 포기했다. 나는 그 옆에 있기만 하면 됐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든 칭찬은 내게 돌아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뺨을 적시고 입 안을 붓게 만들 만큼 울었는데도 계속해서 솟아났다. 무너진 발밑으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움켜쥔 바닥의 모래는 새까만 하늘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낮 동안 받았던 햇빛이 사라지자마자 식는 온기는 얼마나 매정한가. 비겁하고 평탄했던 인생이 꼬였음을 자각했다. 짓밟을 디딤돌이 사라진 나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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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아이돌

헤이 친구.
드디어 왔네.
널 얼마나 기다린줄 알아? 이 지각쟁이야!
응? 왜 그래? 얼떨떨한 기분이야? 내가 왜 여기있나 싶은거지 지금? 그래, 많이 혼란스러울거야.
아, 눈부시다고? 어쩔수없어. 그 빛은 지금 널 따라다니는 거거든. 무슨말인지 이해 못하겠다고? 괜찮아. 차차 알려줄게.
눈이 아프다면 그냥 감고있어 친구야. 예의는 아니지만, 뭐 어때. 응? 내 얼굴? 이런건 쉽게 보여주는게 아니야. 뭐, 조금만 기다리면 볼 수 있을거야.
그래....자기소개를 할까?
흠흠, 나로 말할것같으면 전 우주적인 아이돌이라고 말 할 수 있지! 누구나 다 나를 꿈꾸고 나를 기억해!!
....왜 그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야?
아, 아니라고? 못볼꼴을 본 표정이였다고?
거참 취급 너무하네.
응? 아니야. 난 네가 누군지 알고있어.
어떻게 아느냐고? 말했잖아. 내가 바로 전 우주적인 아이돌이라고. 내 열성팬의 인적사항을 외우는건 기본중의 기본이지.......왜 그런 표정이야? 참고로 스토커 아니야. 나쁜 사람 아니니까 그런 포즈로 뒷걸음 치지 말아줄래? 내가 널 붙잡기전에?
...그래, 고마워. 퍽이나 오해하지 않았겠네.
사실 내가 말을 좀 헷갈리게 하긴 했네. 사과할게.
이렇게 순순히 사과하니까 더 못미덥다고?
아까부터 취급 너무한다니까. 너.
응? 에이, 넌 모르겠지만. 우린 친구였어. 네가 태어났을때부터 친구였지. 뭐? 푸하하!! 아냐, 전생같은건 아니야. 그럴리가 없잖아. 아, 부모님끼리 알고 지내는 사이였냐고? 그것도 아님. 땡. 오답이에요.
응? 아니. 난 너랑 스무고개 할 생각 없는데.
말했잖아 전 우주적인 아이돌이라고.
장난치는거 아닌데. 스토커도 아니고. 사이코패스 살인마도 아니야. 이게 납치면 넌 차라리 자발적인 감금을 당했다고 경찰서에 신고해도 될껄.
그래, 친구야. 이거 진지한 상황은 맞는데 무섭고 엽기적인 상황은 아니야. 그러니 도망가려 하지말고 여기 내 옆에 있어. 나는 늘 네 옆에 있어줬으니.
뭐? 예수님이냐고? 어.....아닌데...아마 그런건 아니지. 우와...최고로 당혹스러운 물음이였어.
뭐, 좀 귀여운 질문이었다는건 인정하지.
응? 왜? 여전히 내 얼굴이 안보인다고? 원래 그런거야. 응. 나는 네곁에 있었지만 늘 볼수 없었잖아. 그런거랑 비슷한거야.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혹시 천사냐고? 이 비슷한 질문에 방금 대답했던거같은데. 아니야, 친구야. 난 천사가 아니야.
내 이름?
정말 모르는거야? 짐작도 못하겠어?
그럼 바이러스나 바퀴벌레도 사람과 고래도 나무와 풀도 행성조차도 결국엔 모두 끝장나게 되어있다는건 알아?
이래도 내가 누군지 몰라?
...정말 모르나 보네.
자기야.
네 평생의 삶 동안 단 한번이라도 내 생각을 하지 않았을리 없어. 잠시 잊어본적은 있겠지만 날 아예 잊지는 못했겠지. 그래, 나는 어쩐지 꺼림칙하고 불길하지. 무서워 할만해. 하지만 너도 알고있었을거야. 언젠간 내게로 올걸 알고있었지.
보라구!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날 위해 살지 않아. 그 반대지. 하지만 그 끝엔 내가 기다리고 있어.
그래, 맞아.
그래, 이제야 알아차렸구나?
응? 조금 더 천천히 왔으면 안됐냐고?
아니지 자기야. 네가 내게로 온거야.
최대한의 느린 속도로 내게 온거지. 네게 주어진 속도로 내게 온거야.
그럼 우리 이제 악수할까?
포옹은 어때?
그래, 반가워.
나야.
네 죽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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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댄스 下

 4.
 “양쪽 고막에 천공이 생겼어요. 구멍이 커서 자연 치유는 안 되겠네요. 방치하면 전음성 난청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럼, 아예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건가요?”
 “방치하면요. 간단한 수술만 받으면 회복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한 시간 내외로 걸리는 아주 간단한 시술이라고 덧붙였지만 그 말은 곧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난청. 그 단어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혹은 구명정의 마지막 자리처럼 안도감 있게 들렸다.
 “고소는 안 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B는 생각만큼 많이 다치지 않았다. 옆구리를 가볍게 스친 정도였다. 큰아버지는 나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서류의 사인과 앞으로 서게 될 법정에서 고분고분히 있는 것. 나는 건네받은 캔커피를 그의 코에 들이붓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왜 안 해요. 그러면 제가 고마워할 것 같아서?”
 “네가 잠깐 돌아서 행패를 부리긴 했지만,”
 행패라니. 마치 B가 남의 장례식장에서 한 짓은 행패가 아니라는 투였다.
 “그래도 나는 널 아직 내 자식처럼 생각한다.”
 “큰아빠.”
 “그럴 수 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상심이 크냐. 그래도 도가 지나쳤다.”
 “도요? 먼저 도를 넘은 건 큰아빠 자식이죠! 제가 아니라요!”
 결국 캔을 집어던지고 자리를 떴다. 깡, 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마음을 우그러트렸다. 모든 것이 끔찍했다.
 5.
 부산행 KTX 표를 끊었다. 살면서 한 번도 여행한 적이 없었다. 학교 소풍이나 수학여행도 전부 빠졌다. 그런 주제에 엄두를 낸 것은 예상보다 빠르게 꺼져가는 청력 덕분이었다. 거기에 말랑말랑한 메모리폼 재질의 귀마개가 용기를 보탰다. 괜찮을 거야. 기차 타자마자 눈 감고 자면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부산에는 삼촌이 있었다. 엄마와 이모들이 업어서 키웠다고 버릇처럼 얘기했던 집안의 늦둥이이자 나의 유일한 친구인 막내 삼촌이. 그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재작년에 회사 발령으로 부산에 내려갔다. 장례식 때는 난장판이라 경황이 없었으니 제대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뜬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독한 가위에 눌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플랫폼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동안 겪었던 모든 멸시와 환난이 거기에 있었다. 두려움이 두 발을 휘감고 구렁이처럼 올라와 숨통을 조였다. 조금씩 어두워지던 시야는 곧 암흑천지로 변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정오를 넘긴 후였다. 이미 출발 시각이 한참 지났으니 표를 취소할 필요도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순서대로 꽂혀있는 책들.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는 물건들. 그들은 나에게 달려들거나 해코지하지 않는다. 내게 안전한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 8평짜리 내 방. 아무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고, 나도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무언가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서랍에서 테이프를 꺼내 방문을 따라 물 샐 틈 없이 몇 겹으로 붙였다. 나는 여기서, 우북하게 자라나는 침묵에 파묻혀 죽을 것이다.
 6.
 밖에서 매도당해 뒈지는 것보다는 혼자 곱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나 그 숨 막히는 평온함도 얼마 못 가 끝났다. 세상은 나를 가만히 두는 법이 없고 틈만 나면 불행을 뒤집어씌우기 좋아하는 저질, 변태, 개자식이었다. 오래 방치했던 핸드폰을 손에 쥔 게 화근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백몇 통, 문자도 오십몇 개. 그중에 큰아빠와 이모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삼촌이었다. 산사태의 잔해처럼 쌓인 문자들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너 왜 연락이 안 돼. 걱정되니까 답장이라도 해. 삼촌 진짜 서울 올라간다. 올라가는 중이다. 거의 다 왔어. 전화 진짜 안 받아? 여기까지 읽고 숨을 들이켰는데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삼촌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삼촌?”
 “야!! 너 대체 뭐하다 이제 받아!”
 “진짜 왔어? 회사는?”
 “……지금 문 앞이야. 얼른 열어, 얼굴 좀 보자.”
 삼촌은 내가 망설이는 낌새를 느꼈는지 당장 열지 않으면 부술 기세로 문을 두드렸다. 방 안이라 들리지는 않았지만 수화기 너머 나는 소리로 짐작건대 아예 발로 차는 듯했다. 나는 그가 한때 격투기에 심취해 아마추어 대회까지 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열 테니까 그만하라고 소리를 빽 지르고 나서야 살벌한 소리가 멈췄다. 테이프를 뜯어내고 방 밖으로 나가 대문 도어락을 풀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아이고, 얼굴이 왜 이렇게 반쪽이 됐어.”
 잠깐 성난 곰 같았던 얼굴은 나를 보자마자 미어캣으로 변하더니 이내 비 맞은 퍼그처럼 불쌍해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삼촌. 울지 마.” 
 “안 울어, 마.”
 하하. 가벼운 웃음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문득 이렇게 웃은 게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낮에 손톱만 한 초승달을 발견한 것처럼 생경했다. 삼촌은 괜찮다는 데도 기어이 배달되는 한식점을 찾아 음식을 시켰다. 우리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삼촌은 누나가, 우리 엄마가 꿈에 나왔다고 했다.
 “너 살 빠진 거 나보고 도로 찌워놓고 가랬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감정이 가슴께로 밀려와 울렁였다. 두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이제 보니 삼촌도 얼굴이 많이 상했다. 예전에는 항상 멀끔해서 반질반질한 사과 같은 인상이었는데. 눈 밑으로 거뭇하게 그늘이 지고 볼이 옴폭 들어간 데다 턱 위로 꺼칠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삼촌. 나 난청이래.”
 “뭐?”
 “수술하면 괜찮대. 근데 나는 그러기가 싫어.”
 “…….”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삼촌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아니, 미안. 보통 고등학생이 그러면 건방지다고 할 텐데, 니가 그러니까… 뭐라고 못 하겠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배달 음식이 왔다. 삼촌은 손수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 나머지 반찬들을 꺼내어 식탁에 놓고 랩을 벗겨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일하던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냐고 물어서, 내가 잘랐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삼촌은 이유를 물으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따끈한 백반을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많이 먹어.”
 삼촌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도 딱히 식욕은 없어 보였는데 일부러 먹성 좋게 먹는 것 같았다. 나도 마지못해 한술 떴다. 생존의 이유를 잃어가는 이에게 식사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다. 깨작거리며 어느 정도 먹었을 때 삼촌이 머뭇머뭇 이야기를 꺼냈다. 있잖아, 염치없는 얘기인 건 아는데.
 “삼촌이 요즘 힘들어.”
 “…….”
 “빚이… 좀 생겼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식탁 위에 놓인 삼촌의 손을 잡아 토닥였다. 얘기해봐, 얼만데. 삼촌은 어두운 얼굴로 나를 흘끔 보고는 다시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팔천만 원.”
 “팔천만 원?”
 “사실 회사 때려치운 지 좀 됐어. 친구랑 사업하려고 했거든. 근데 그놈이 돈만 들고 날라버려서….”
 팔천. 일 문제로 통화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훨씬 높은 금액이 쉽게 오갔던 걸 떠올렸지만 그 규모가 선뜻 와닿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미성년자였고, 내 손으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어린애였다. 가늠할 수 없는 일에 망설이는 동시에 선뜻 삼촌을 잡아주지 못하는 내가 호래자식처럼 느껴졌다.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된 나에게는 삼촌이 마지막 남은 버팀목이었다. 삼촌이 내 손을 꽉 잡았다.
 “한 번만 도와줘. 삼촌이 꼭 갚을게.”
 그의 진심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삼촌이 나에게 얼마나 잘 해주었는가. 그러나 나는 보았다. 삼촌의 눈동자가 발하는 어두운 빛을. 희미하게 비틀린 입가에 고인 탐욕을. 피식자 특유의 예민한 본능이 내가 그것을 알아보게 했다. 그건 큰아버지와 똑같은 짐승의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게 삼촌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삼촌은 얼어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매정히 내칠 수 있냐고 말하는 듯한 피해자의 얼굴을 했다.
 “미안. 내가… 내가 다시 연락할게. 오늘은 그냥 가줘.”
 그는 다시 손을 잡으려다 실패하자 허리를 껴안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땡땡아, 제발, 제발 한 번만 도와줘. 너밖에 없어. 균형을 잃고 휘저은 팔에 의자가 쓰러지고 식탁의 그릇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삼촌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집히는 그릇 아무거나 손에 쥐고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거 놔, 나가, 나가라고, 나가!!”
 있는 힘을 다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겨우 그를 쫓아낸 뒤 다시 고요해진 집은 어느 때보다 난장판이었다. 고여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 안 가 둘째 이모에게 삼촌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너한테까지 가서 행패 부렸다며? 이모가 대신 사과할게. 이모는 담배를 태우는지 깊게 숨을 내쉬고는 자세한 얘기를 해줬다. 글쎄 걔가 진 빚이 죄다 노름빚이더라고. 부산에서 밤낮 도박장 드나들다가 회사 잘리고 돈도 날리고 나중엔 사채 끌어다 처박았댄다. 도박에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지금은 내가 병원에 겨우 입원시켰어. 애가 아주 성실하지는 않았어도 한량은 아니었는데 막내라 너무 오냐오냐 키웠는지……. 얘, 넌 별일 없지? 이모는 덕분에 흰머리 왕창 나서 할머니 다 됐잖니. 깔깔깔.
 7.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잡을 지푸라기마저 사라진 기분은 참혹했다. 큰아버지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나에게 갖은 농간을 부렸다. 번지르르한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에게 완전히 질린 나는 내가 죽더라도 이 인간에게만큼은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모순적이게도 큰아버지의 존재가 나에게 살아갈 힘을 준 것이다. 관련 법을 공부하고 아버지와 연이 있던 변호사에게 연락을 넣어 상담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그간 받았던 겁과 사탕이 같잖은 협잡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아버지는 소송에서 졌다. 법원은 제삼자인 변호사를 후견인으로 선임했다. 소송을 건 큰아버지를 포함해 친척 중 재산을 욕심낼만한 이들이 많으니 당연한 판결이었다. 물려받은 재산과 사망보험금은 내가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신탁에 맡길 거고, 그렇게 되면 누구도 내 재산에 눈독을 들일 수 없게 된다.
 
 “잘 끝났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법원을 나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변호사는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난청이 상당히 진행되어서, 이제 반 정도는 입 모양을 읽어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얼굴 펴고, 어깨도 펴고. 나중에 내 나이 되면 고생해.”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올려 웃으니 과연 좀 나았다. 문득 올려다본 법원 건물 위로 회색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 때마다 헐벗은 나무들이 춤을 췄다. 코트를 더 단단히 여미고 귀 위로 털 달린 귀마개를 덮어 썼다. 그녀가 품에서 차 키를 꺼내면서 물었다.
 “집까지 태워다 줄까요? 추운데.”
 “아, 아뇨. 택시 타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해요.”
 시내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려다 음악이라도 틀었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들어 일단 걷기로 했다. 평일 낮인 데다 날씨가 추워서 거리는 한산했다. 상가가 없는 쪽으로 돌아가다가 아파트 단지를 질러 집으로 가면 음악도 마주칠 일 없고 안전하겠지. 아무튼 별 탈 없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밤마다 법정에서 춤추는 악몽에 시달리는 바람에 심적으로 더 힘들었다.
 “야.”
 마음 놓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던가. 별안간 귀마개가 벗겨졌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큰아버지가 내 귀마개를 들고 서 있었다. 카악, 퉤. 그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꼭 얼굴에 침이 튄 것처럼 아주 더럽고 모욕적이었다.
 “끝이라고 착각하지 마. 내 새끼한테 그런 짓 하고도 발 뻗고 잘 수 있을 줄 알아?”
 그는 흉악한 표정으로 귀마개를 반대로 꺾어 부러트린 뒤 바닥에 내던졌다. 내 다리를 저렇게 부러트리고 싶은 거겠지. 나는 정말로 지긋지긋해졌다. 이미 지독히 덧난 염증이 곪아 터져 고름이 흐를 지경이었다. 
 “예전에 아빠가 빌려준 것도 다 말아 먹었으면서.”
 “뭐야? 그건 어른들끼리 애저녁에 다 끝난 얘기야!”
 “큰아빠 사업병 있는 거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알아요! 그런데 후견인은 무슨, 이 사기꾼 새끼야!”
 그는 참지 못하고 내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부진 그를 힘으로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살면서 크고 작은 싸움에 자주 휘말렸기 때문에 맷집만은 좋은 편이었다. 여러 대 맞은 뒤 옷자락을 붙잡고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그의 고간을 걷어차고 도망쳤다. 억!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는 큰아버지를 뒤로한 채 무작정 달렸다. 긴 이명이 산발적으로 양 귀에서 울려 몇 번이고 벽에 몸을 부딪쳤다. 방향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가쁜 숨이 터질 때까지, 다리가 완전히 지쳐 멈출 때까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다리 위였다. 세찬 칼바람 사이로 눈이 흩날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파도 못지않은 세찬 물결이 넘실거리며 다리기둥에 부딪혀 부서졌다. 이런 날 물에 뛰어들면 적어도 저체온증으로 죽지 않을까? 그 물음을 시작으로 생각해봤자 소용없는 소모적인 가정들이, 여태 결론 내리기를 보류했던 질문들이 상처 틈새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어딘가 돌이킬 지점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부모님은 나를 버린 게 아닐까. 내게 드디어 오만 정이 떨어져 사고를 위장하고 도망가버린 게 아닐까. 시신까지 내 눈으로 다 확인했으면서. 이제 어떤 사소한 일상도 공유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흑, 참지 못하고 흐느끼던 그때였다.
 “…….”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먹은 것처럼 고요했다. 어깨 위로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8.
 침묵하는 세상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랜 풍파 끝에 맞이한 평온함과 함께 막막한 바다에 표류한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나아갈 이정표가 필요했다. 언젠가 한 소설가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 종이를 놓고 펜을 들자마자 원래 그렇게 약속되어 있었던 것처럼 손이 움직였다. 단어가, 문장이, 나를 이루는 모든 기억이 낱낱이 춤을 추었다. 첫 문장은 이런 글이 흔히 그렇듯 자신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음악이 들리면 몸이 멋대로 춤을 추는 병이다. 웃지 마라. 이것은 아주 좆같은 일이다. 나는 가족, 이웃, 선생님, 같은 반 아이들, 그 외 길 가던 행인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면서 자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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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569돌, 2015년) 기념 폰트 다운로드, 배포 관련 정보

http://www.asan.go.kr/font

아산시에서 제 569돌 한글날을 기념하며 무려 "성웅 이순신장군의 웅혼한 서체!" 를 배포하고 있다.
- 개인,학교,공공기관 등 누구나
- 영상, 인쇄물, 웹, 모바일 어느 곳이나
http://dnomade.com/web/m_page.php?ps_pname=print_datawork04

디노마드에서 3개월간 산돌구름을 사용할 수 있는 쿠폰코드를 제공하고 있다.
산돌구름의 신규회원만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탈퇴 후 재가입해도 안된다고...
- 상업용도 사용가능
- 모바일 불가 (PC Only)
- 원본 폰트 사용 불가 (웹폰트 X, 어플리케이션 삽입 X)
- 자세한 라이센스는 산돌구름에 문의하거나 링크 참고
http://m.cast.yanolja.com/detail/2171

야놀자에서는 싸인펜으로 쓴 손글씨를 모티브로 제작한 야체를 무료 배포하고 있다. 
- 개인, 기업 사용자 모두
- 언급은 없으나 광고에 활용하라는 설명은 인쇄물에도 쓸 수 있는게 아닐까?
- 하지만 라이센스 확인은 필수
http://www.spoqa-han-sans.com

구글과 어도비가 합작으로 만든 Noto Sans 를 커스터마이징한 폰트로 한국어, 영어, 일본어 포함.
깃허브를 통해 웹폰트도 서빙하고 있고 서브셋 용량이 414KB 라고하니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을 듯.
이건 링크타고 소개페이지 꼭 보셔야함.
폰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스포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느껴짐.
- 라이센스에 대한 정확한 언급이 없으나 Noto Sans 의 라이센스인 Apache License 2.0 이 아닐까 짐작. 문의 필요.
- OFL 이라고 페이지 하단에 링크 있네요
http://goo.gl/tzQpJn
산돌구름 스튜던트 6개월.
산돌구름 자체 이벤트나 디노마드 이벤트는 3개월인데 비해 기간이 2배! (그런데 스튜던트!)
대학생 필수 앱 에브리타임을 설치하고 한글날 배너를 클릭하면 된다고 함.
http://www.busanbadattf.com/

부산대 학생 남승우씨(후.. 훈남이네)가 부산체를 수정 개발한 폰트
머니투데이의 기사에 따르면 하루 10~20자씩 27개월간 개발했다고. (짝짝짝!)
- 개인, 기업 사용가능
- OFL 1.1 (오픈 폰트 라이센스)
http://googledevkr.blogspot.kr/2015/10/noto.html

Noto Sans KR 의 웹폰트가 드디어 Early Access 에서 제공됩니다.
한글날은 조금 지났지만 "훈민정음 반포 569돌을 맞이해서 자그마한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라고 밝히고 있어 이 포스팅도 업데이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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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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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는 당신이 아는 사람, 알지도 모르는 사람, 알았던 사람,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갑자기 이야기하려고 튀어나온 사람!
내 이야기 들어 보겠어? 
어어, 가만히 앉아 있어 봐. 마침 한가한 참이잖아? 
하하 아니라면 말고, 화낼일은 아니잖아.
가만히 이 앞에 앉아서 스크롤만 내리면 되는 일이야. 쉽지? 당장 해보라구.
나의 이야기는 '그때 그 남자를 죽였더라면' 으로 시작 하지.
누구에게나 후회되는 일은 있지 않겠어? 그래, 가볍게 그런 얘기인거야.
오, 이건 수평선이라는게 뭔지 한번 눌러본거야.
이런거군!
아, 내 이야기 하려던 중 아니었냐고?
그래그래. 맞아. 나는 말하다가 가끔 딴길로 새곤하거든. 
그래도 다시 돌아오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저 읽히는 대로 읽으면 돼! 이건 그런 글이니까!
난 책임감이 부족해서 이걸 꾸준히 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일단 내 이야기를 시작할게.
아 그때는 난 너무 어렸지. 또래보다 키도 작은 아이였어. 부모님이 참 걱정을 많이 했지.
옷가게에 가도 엄마가 내 나이를 말하면 "어머, 나이보다 훨씬 약하네!" 라는 말을 꼭 들었지. 음, 아줌마들의 '약하다' 라는 말은 키가작고 말랐다는 뜻인 것 같아. 매번 듣다가 뜻을 짐작해봤는데 아무튼 그런 것 같애.
나는 친구들과 골목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지.
딱 2000년대 초반의 유치원생의 전형이었어. 내가 몸집이 약한 것만 빼고 말이야.
혹시 지금 내 나이를 계산하고 있니? 아마 이십대 언저리라고 계산될거야. 안 궁금했음 말고. 나라면 궁금했을것 같아서. 나는 년도 이야기가 나오면 나이를 계산하는 버릇이 있거든. 당신은 안그러니?
키가 작다는건, 또래들의 놀림감이 되는 일이야.
그 어린것들이 만만한 상대를 기가막히게 알아 채는거지. 이건 사람의 본능일까? 아님말구.
나는 작은 키 때문에 놀림 받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어. 그땐 그랬다구. 지금이라면 뭐. 내 키를 놀리는 사람의 코를 때려줬을거야. 코피라도 내줬을거라고.
하지만 어릴적의 나는 아니었지.
당신은 무책임한 부모에게서 자란적이 있니?
정말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기르고 싶어서 계획하고 낳은 아이가 아니라, 그냥 이 쯤되면 아이를 가져야 할 것 같아서 낳은 아이가 되어본적이 있느냔 말이야.
참.좋은일은 아니지.
뭐,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애들은 대부분 그렇게 태어났을거야. 아닌 애들도 있겠지만, 이야, 걔넨 참 복받았어?
그렇게 태어난 애들의 부모는 대게 육아에 무지하기 마련이야. 안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내 부모는 그랬어.
내가 편견을 가진건 아니지만 내 부모는 둘다 한부모 가정에 시골출신이였어.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몰라.
나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어.
조금만 잘못하면 윽박지르고, 짜증내고, 무관심하고, 울면 더 때리고, 말안듣는 애는 맞아야한다, 엄마는 우는 애가 제일 싫다고 했다, 너 이럴거면 당장 집에서 나가!
이건 가정 폭력이지. 나는 그때 아마... 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구나.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난 절대 애 안 낳을거야. 불쌍하잖아. 무슨 죄로 나한테서 태어나는 거람?
나는 내 생각을 말하면 혼나는 줄 알았어. 
싫은걸 거부하면 큰일 나는줄 알았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저절로 나오는 눈물을 그냥 흘리는 것 뿐이었어.
그래서 나를 놀리는 애들 앞에서도 눈물만 뚝뚝 흘렸지. 선생님이 날 발견하고 그 애들을 혼내주러 올 때 까지 말이야.
아, 다시 생각하니까 정말 답답하네.
지나간 일인걸 뭐 어쩌겠어.... -이건 나한테 해주는 말이야.
내가 여느때처럼 골목에서 놀고 있었어. 그때 옆집에 살던 동갑친구 하나와 흙놀이를 하고 있었지. 나는 원복을 입고 있었어. 기억이 정말 선명해.
내가 사는 곳은 다세대 주택, 빌딩이 밀집한 곳이었어.
내가 놀던 골목은 바로 집 앞골목이었지.
아, 그때 소리라도 지를걸. 
엄마악!!!!!! 도와줘,살려줘!!!!!!!
그때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였던것 같아. 아니라면 그 남자가 입은 옷이 너무 더워 보인다고 생각했을리가 없어.
남자의 얼굴은 기억이 안나. 내 키는 그남자의 허리께도 안됐거든. 내 시야에 들어온건 남자의 목아래 부터 뿐이었어.
당신 만약에 주위에 아는 어린이가 있다면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꼭꼭 말해둬. 볼 때마다 말해줘.
내가 그때 그 남자가 그네를 타러 가자는 말에 바로 따라갔거든.
ㅋㅋ 만약에 유괴살인범이었어봐. 와 까딱했음 나 지금 이 글 못 썼다.
나는 그때 그네를 너무 좋아했어.
집앞에서 하는 흙놀이보다 그네가 더 좋았다고.
그래서 나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어서 그 남자가 (게으른 엄마는 데려가 주지 않는) 그네가 있는 놀이터로 나를 데려가길 바랐지.
그런데 뭐지? 남자가 내 손을 잡고 바로 우리집옆 빌라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는거야.
그빌라가 지 집도 아닌지 원래는 이층까지만 올라갈 거였나봐. 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어서 그네가 나타나길 바랐지.
난 너무 어린 아이였어!
근데 같이 놀던 남자애인 내 친구가 자기도 그네를 태워달라고 우릴 쫓아왔어. 
지금 보면 나한테는 다행인 일이었던거지.
"아저씨, 나도 그네탈래요. 네?"
친구야, 지금은 연락안하지만 그때 열심히 쫓아와줘서 고마웠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주변 어린이한테 꼭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해! 언제나, 어디서나!
얘가 계속 쫓아오니까 그 남자가 "넌 좀있다 태워줄게 거기 있어봐." 뭐 이런식으로 말했던것 같아.
그리고 계단을 좀더 올라가 어느 집 문 앞에서 자기의 바지 지퍼를 내리는게 아니겠어?
내복을 입고 있었어. 빨간색 내복.
그리고 그 내복도 내리려는데 내가 부모한테 얻어먹은 눈치가 발휘된건지 몹시 불길한 기분이 드는거야.
근데 뭐. 내가 울기 밖에 더 하겠어.
"알겠어. 이건 안 벗을게 이위로 만져봐."
씨발 그게 그네야? 그게 그네냐고.
나는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한 손이 잡힌채로 가만히 있었지.
"10분만. 아니 5분만."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아다가 빨간 내복위로 자기 고추를 쓰다듬잖아. 이 씨발럼이.
내가 아무리 어렸어도 그 행동이 더럽다는건 어렴풋이 느꼈어.
나는 내 손을 꽉 쥐고 놔주지 않는 무서움에 결국 크게 울어제끼기 시작했지.
내 울음소리를 듣고 빌라에 사는 사람들이 나올까 당황했나봐. 그 남자는 빌라를 벗어나 가버리고 나는 친구와 같이 밖으로 나왔어.
친구는 내게 왜울어? 뭐한거야? 그네는? 물었지만
나는 말없이 집으로 갔어.
엄마는 또 누가 놀렸냐, 괴롭혔냐, 아까 같이 놀던 그 애가 그런거냐 했지만 나는 말없이 울기만 했어.
늘 하던대로 말이야.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까 너무나 다행이야. 그정도로 끝나서.
내가 조금만 작게 울었어도. 남자가 그 빌라에 살았어도. 우는 내 입을 틀어막았어도.
나는, 어떻게 됐을까?
당신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유치원생이 성인 남자에게 끌려가 고작 성추행만 당하고 끝난일이?
그래, 퍽이나 다행이지.
난 몇년이 지나도 뚜렷이 기억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는데. 아 정말. 그 남자 죽여버리고 싶다.
내 이야기 어때? 재밌었니? 
오우. 나도 재밌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야. 
너무 정색하지마. (정말 재밌어서 깔깔 웃었다면.. 난 인간 이하 말종은 상종하고 싶지 않네.)
이건 그냥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구.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말이야.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야.
하하. 이야기는 많아. 차고 넘치지!
꼭 이런 성추행당한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야.
다음에 글 쓰면 또 읽으러 올래?
그럼 안녕!
나는 당신이 아는 사람, 알지도 모르는 사람, 알았던 사람, 알지 못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