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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딱 30년을

시라는 것에

마음 뺏겨 지내왔는데

막상 돌아보니

제대로 된 글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내려놓아야 할까?

아니면

20대 초반의 그 열정을 다시금 불피워봐야 할까...


감각도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지 오래인데

대체 무엇 때문에

접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시시해서 시
라는 말도 있지만

정작 마주하면

얼굴만 붉어지고......


어디서 왔지?
[["synd.kr", 24], ["unknown", 410]]
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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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만남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그럼 어떻게 먹고 사세요? 내 무례하고 유치한 공격에 남자도 진부한 답변을 했다. 꿈을 먹고 살지요. 여전히 미소가 마르지 않은 가벼운 얼굴이 속을 답답하게 했다. 오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꿈이 선생님의 밀린 전기세를 해결해 주지는 않잖아요. 그러자 그의 웃음이 진해진다. 그래서 요즘 양초를 켜요. 생각보다 쓸만합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피웠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비수처럼 던져뒀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하다. 짐승을 찌를만큼 날카롭게 갈아낸 칼날도 그의 가죽은 뚫지 못할 것이다.
허탈함이 지나간 뒤 따라온 건 졌다는 느낌이었다. 찻잔 끝에 말라붙은 커피의 색은 내 패배감과 같았다. 그러나 패인은 생각보다 뾰족했다. 내게는 맹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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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라면

-아토피와 알레르기는 다르다-
어릴때부터 엄마가 너무 유난 떨어서
애가 면역이 없어 그렇다는둥
헛소리들 찍찍하더니 본이 얼굴이 올라온거 보면
신경 써야겠다며 그때서야 이해하는척 한다
그래서 울아들은 색소들어간거,탄산,라면등
몸에 나쁜건 다 좋아한다-못먹게해서-
그중에서 라면을 젤 좋아한다
라면은 바닷물보다 짜고 GMO로 만든
세상에서 가장 몸에 나쁜 음식 1위 
씨리얼 다음으로 몸에 나쁘다고 한다
라면 면빨은 밀가루가 들어갔으면 다행이란다
그런데 1988 볼때마다 라면이 나와서
먹고 싶어 미칠것 같다
주말엔 나도 밥하기 싫다-언제나지만-
울신랑이랑 아들도 라면을 좋아한다
나도 1988때문에 라면이 먹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라면을 먹었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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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굴던 무더위가 뚝 꺾일 즈음이 되면, 우리 마을은 어김없이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심한 날은 자기 발도 잘 안 보일 정도라, 안개라기보다는 거대한 먹구름이 온 산맥을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이걸 안개철이라고 불렀다.

 “만약 안개에 불이 붙으면, 여기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안개철은 좁은 시야만큼이나 사람의 생활도 어둡고 축축하게 만들었다. 마을에 있던 외지인들이 전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한 철 장사로 먹고 사는 이들이 반절이 넘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밟혀 죽지 않기 위해 숨을 죽여야만 했다.

 “방화범이 되고 싶은 거야?”

 내 말을 듣고 찡그린 누나의 얼굴은 여기저기 터진 상처들로 붉어 보였다. 문득 아래로 내린 시선에 걸린 것은 물결치고 있는 수많은 멍이었다. 피가 말라붙은 입안에 비린 맛이 가득했다. 나는 덜어낸 연고를 상처 위에 조심스레 바르며 대답했다.

 “아니… 오가닉 테러리스트.”
 “…머리 잘못 맞았나 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 피식 웃는다. 그제야 한 줌 번지는 웃음만이 우리가 잡고 있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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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son that I like you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바라볼 때 반짝이는 눈, 말할 때마다 지어주는 웃음, 애정이 가득 담긴 잔소리, 갑작스레 잡아오는 손. 그게 다다. 나는 유난히도 햇빛이 우리를 따스히 감싸주던 날 네게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당연한 듯 내게 손을 잡아오던 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던 건 모는 게 너였기 때문이었다. 너였기 때문에 맑았고, 너였기 때문에 눈이 부셨고, 너였기 때문에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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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감기

베개를 끌어안자 더운 숨이 베갯잇에 부딪혀 얼굴로 되돌아왔다. 머리가 웅웅 울리고 코언저리가 뜨겁다. 일어나고 싶은 동시에 일어나기 싫어서 갈등하다가 결국 번데기처럼 이불을 둘둘 만 채로 구물구물 일어났다.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지 허리를 세우자마자 세찬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아, 왔다, 왔어… 어쩐지 어제부터 낌새가 수상쩍더라니.
 방전되어 있던 핸드폰에 밥을 주고 전원을 켜자 문자 서너 개가 한꺼번에 떴다. 일어났어요? 저는 지금 일 마무리하고 버스 타요. 열한시쯤이면 터미널 도착할 거예요. 미열 때문에 멍멍한 손끝으로 늦은 답장을 보냈다. 조심해서 와. 근데 나 감기 왔나 봐. 올 때 종합감기약 하나만… 거기까지 보내고 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깊게 잠들지도 못하고 넘실거리는 수면에 이리저리 떠다녔다. 잠결에 문이 열리는 소리, 이마를 짚는 찬 손과 A의 먼 목소리를 들었다.
 많이 아파요? 오면서 죽 사 왔어요. 약이랑 먹고 자요.
 대답만 겨우 하고 한참 정신을 못 차리다가 간신히 상 앞에 앉아 죽을 떴다. 분명 새우랑 당근 같은 게 보이는데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없는 식욕에 억지로 씹을수록 머리가 무거워진다. 오로지 의무감으로 반 그릇을 비운 뒤 약을 먹고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폭 떨어지듯 꾼 꿈에는 내가 걸린 감기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왔다. 놈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몸살과 열도 데려왔다. 그것들과 놀다 보니 한겨울인데 나는 점점 따끈따끈해지고, 줄줄 흘러 바닥으로 퍼져갔다. 킬킬 악독하게 비웃는 것들에게 팔다리를 허우적대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개꿈이야. 식은땀으로 등과 머리가 축축했다. 숨을 들이쉬자 내내 꽉 막혀 있던 콧속으로 시원하게 바람이 들어온다. 뻐근했던 몸이 조금 개운한 듯도 했다. 약이 잘 듣나. 누워서 마른세수를 하다가 또 잠들었다.
 좀 살만해진 저녁. 나는 소파에 반쯤 누워 시집을 보고 A는 옆에서 키위를 잘랐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 사이로 A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키위가 미네랄이랑 비타민이랑 뭐더라, 미네랄이 많대요.
 이미 수십 번 읽은 시집은 책장을 덮어도 눈을 시리게 했고, 조곤조곤 말하는 네 목소리는 어딘가 봄볕 같은 데가 있었다. 하루 동안의 병 앓이로 가슬가슬해진 몸이 금세 녹녹해진다. 어느새 접시에 산처럼 쌓인 키위를 한 조각 찍어 먹자 입 안에서 무르고 신 과육과 까만 씨가 자박자박 씹혔다.

 해가 지나간다. 감기도 과일도 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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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삶

삶이 댓가를 요구하는건
내 기억엔 없지만
내가 원했기 때문이겠지.
선택없이 태어났다는건
모든 쉽게 잊어버리는
내 변명이겠지.
그때의 간절함은 잊혀졌지만
이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간절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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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끝자락

세상을 가리는 달 하나 지고나니
가까운 너머마저 보이지 않는구나
이토록 어둡게 세상을 가린 이유가
비스듬히 비치는 여명 때문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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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일기上

 이제는 누구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사실 H에게는 망나니 같던 시절이 있었다. 애티를 못 벗은 얼굴로 다 자랐다고 착각하던 중학생 무렵. H는 교내에서 유명한 또라이였다.

“내가 살다 살다 너 같은 꼴통은 처음이다.”

 당시 담임을 맡았던 학주는 H의 입학 이후 터진 수십 건의 개싸움에 뒷목을 잡았다.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라는 것이 그의 굳은 지론이었는데, 그간 수많은 선배들을 갱생시켰다는 사랑의 매타작도 H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마이며 넥타이는 늘 실종 상태에, 정해진 수업 시간과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다. 더러운 성정만큼 입도 거칠어서 시비가 붙으면 반드시 싸움으로 번졌다. 의자를 던지고, 창문을 깨고, 끝까지 쫓아가 피떡을 만들어 놓았다. 늘 화난 짐승처럼 구는 H를 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모글리를 납치해서 학교에 보내면, 아마 너랑 비슷할 거야.”
 “…모글리가 뭔데.”
 “몰라? 정글짐에 나오는 주인공.”

 그때 우리는 한참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H는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을 잔뜩 우그러트린 채 나를 빤히 노려봤고, 교실 분위기는 한층 더 살벌해졌다. 개의치 않고 디저트로 나온 요플레를 뜯어 뚜껑을 핥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식판도 안 치우고 말이지. 긴장으로 숨까지 참고 있던 애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떠들기 시작했다.

 H가 자리에 없을 때면 가끔 반 애들이나 선생이 나에게 하소연했다. 네 동생 좀 어떻게 해 봐. 딱히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같은 날 태어났지만 H와 나는 외모도 성격도 극단적으로 달랐다. 그런데도 형제인 게 소문이 난 이유는 내가 H를 건드려도 싸움이 나지 않는 유일한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H를 갱생시킬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나는 낄낄 웃으며 항상 똑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으면 진작 했지. 그러면 다들 깊이 수긍하고는 돌아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을 하나 고백하자면, 그때까지 H는 나에게 일종의 취미생활이었다. 동물원에서 코끼리 쇼를 구경하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H를 간간히 관찰하는 것이다. 공부 외에 별다른 취미도 특기도 없는 심심한 인간인 나에 비해 놈은 흥미진진함으로 가득 찬 통제할 수 없는 동물이었다. 지금은 전부 불타 없어졌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몰래 써온 관찰 일기도 그즈음 열 권이 넘어가 있었다.

 이런 일상이 계속되리라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착각이었는지 깨닫게 된 건 중간고사가 끝난 5월이었다. 내내 H를 고깝게 보던 3학년들이 직접 학교 뒤편으로 H를 불러냈던 날. 점점 실세에서 밀려나 마음이 급했는지 열댓 명쯤 되는 놈들이 모여 한꺼번에 다구리를 놓았다. 아무리 싸움에 도가 텄어도 쪽수로 밀어붙이는 데는 수가 없어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패도 패도 일어나던 H는 코와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살벌한 눈빛에는 마치 좀비 같은,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검은 생명력이 반짝였다. 미친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다들 때리기에도 지치고 질려서 헉헉대고 있을 때였다.

 “…어?”

악에 받친 한 놈이, 어딘가에서 쇠파이프를 주워 달려오고 있었다. 벤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것조차 잊고 뛰쳐나갔다. H, 소리쳤지만 늦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H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상황 파악이 되자마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심지어 H를 때린 놈마저도.
 소란에 수위 아저씨와 선생들이 달려왔다. 그들이 구급차를 부르고, 용의자들을 잡아 이름을 적는 동안 나는 꼼짝 없이 서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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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 nothing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잘 모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잘 아는 것에 대해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

정말 중요한 것은, 나만 아는 진실도 절대 이야기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타자에게선, 잘 모르는 것이거나, 잘 알지만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로 인해 다른 인지적 편향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야.

당신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제대로 알고 말을 하는 것인가?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았으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내가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을 그대로 주창하면 속이 편한 것일까? 의문이 많아.

그러니까, 그냥 술이나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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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일기下

 가족 중 누구도 병원 신세를 길게 져 본 적은 없었다. 그 최초가 H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동안 H를 거의 포기하고 내버려 두었던 부모님은 자신들의 방치에 어떤 책임을 느낀 것 같았다. 이 지경까지 온 게 자신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자책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집에서 늘 하던 부업을 미룬 채 오로지 간호에 매달렸다. 아빠도 되는 데까지 휴가를 쓰고 되도록 병원에 붙어 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난 뒤 H를 보러 갔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일상을 반복하는 며칠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류는 조금씩 달라졌다. 늘 나에게 치우쳐져 있던 관심이 균형을 맞추듯 H에게로 흘러갔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곧 불균형이 될 거라는 걸 멍청하게도 그때는 몰랐다.
 “H. 안 심심해?”
 “…….” 
 “야, 대답 좀 해 봐.”
 아픈 H는 생소했다. 말 걸어도 대꾸 하나 없고, 밥 먹고 볼일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뇌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랬는데… 약간의 의구심과 불안감은 가볍게 증발했다. 아프니까 그렇겠지. 다 낫기만 하면 평소처럼 돌아오겠지. 간이침대에 엎드려 문제집을 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며칠째 백지만 넘기고 있는 관찰 일기에도 쓸 거리가 생길 거라고.

 H가 퇴원한 주말, 집에서도 내내 자던 녀석은 갑자기 한밤중에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책을 읽다가 놀라서 급하게 H를 붙잡았다.

 “너 어디 가.” 
 “산책.” 
 “이 시간에?” 
 “답답해서… 계속 병원에만 있었잖아.”
 부모님이 있는 침실을 흘끔 내다봤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이거 말려봤자 안 듣겠지. 하는 수 없이 얇은 재킷을 걸치고 나도 따라나섰다. 사람들이 잠들었을 시간. 까만 밤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H는 번화가 정 반대편, 산이 깊고 길이 외진 쪽을 향해 걸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하염없이 나아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헛헛해 보였다. 쟤가 저렇게 가벼워 보인 적이 있었나.

 H, 어디까지 갈 거야. 내내 돌아보지 않던 녀석은 내 물음에 걸음을 멈췄다. 전철이 지나다니는 굴다리 안이었다. 근처의 개천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비린내와 함께 개구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짐작하기에는 수백 마리 같은 울음이 바글거렸다. 

 “……형.”

 평생에 걸쳐 H가 형이라고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H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조용해.”
 “뭐?”
 H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전철이 세찬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갔다. 거대한 소음이 계속해서 말하는 H의 목소리를 덮고 귓속을 가득 채워 몸을 뒤흔들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전철이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겨우 말 끝자락을 붙잡을 수 있었다.
 “…벌레 떼처럼 들끓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문득 선뜩한 공포감이 신물처럼 차올랐다. 마주친 H의 눈이 너무도 낯선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조용해서…”
 “…….”
 “귀가 멀어버린 것 같아.”
 H는 바스라기 같은 웃음을 피웠다. 언제나 드세게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처럼.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날 밤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H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교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제시간에 학교를 왔다.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책에 필기라는 걸 했다. 부모님, 선생님, 반 아이들, 너나없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그리고 좋아했다. 이제 좀 살겠구나. H에 관한 일이라면 늘 비이성적으로 변했던 모든 곳에 평화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 평화는 내게 곧 불행이었다.

 “너 머리 병원에서 다시 검사받아보자.”
 “나 멀쩡해.” 
 “아니야, 뭔가 이상이 있어. 미친 것 같다고.”
 “…미친 건 형 아니야? 헛소리 그만해.”
 저벅저벅 자리로 돌아가 얌전히 책을 펼치는 H를 보며 머리를 잡아 뜯었다. 저게 뭐야. 겉가죽 외에는 비슷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저게 어떻게 H야. 내가 부정하거나 말거나 현실은 점점 확고하게 못 박혀 갔다. 갱생한 H, 정신 차린 H. 모두 기뻐하는데 나만 화가 났다. 하루아침에 무미건조해진 생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손을 놓고 수업을 듣다 보면 학교에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고는 했다.

 혼란스러운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악몽을 꿨다. 놈의 안에 있다고 믿었던 악마가 내게로 찾아온 것 같았다. 온갖 짐승에게 물어뜯기고, 절벽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삼지창에 쉴 새 없이 몸이 찔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겨우 잠에서 깨면 불면의 시작이었다. 새파란 새벽을 타는듯한 머리로 새까맣게 지새웠다.

 잠을 못 자는 날이 늘어갈수록 성격도 뾰족해졌다. 날카롭게 갈린 신경이 스스로를 찌를 때마다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몸은 점점 말라가고, 성적은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사사건건 예민하게 굴자 친구들도 떨어져 나갔다. 안에서 자라난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는 내가 울컥할 때마다 끓어오르기도 했다. H가 말하던 끓는 상태라는 게 이런 걸까.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듯한 막막함이 명치께 가득 쌓여갔다.

 “…너 때문이야.”

 무작정 방에 들어와 돌을 던졌다. H는 나를 흘끔 쳐다봤다가 이내 풀던 문제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나 때문인데. 사각사각 종이 위를 스치는 연필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너 때문에 여기가 지옥이 됐어. 잠깐의 정적 사이로 바깥의 소음이 끼어들었다.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 엄마와 아빠의 듣기 싫은 웃음소리. 나를 깡그리 무시한 채 홀로 평온한 녀석을 보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H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잘됐네.” 
 “…….” 
 “축하해.”

 빈틈없이 꾹꾹 눌러온 화가 결국 터졌다. 구석에 박혀 있던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맞아서 이렇게 됐으니, 한 번 더 맞으면 예전으로 돌아갈 거야. 근거 없는 확신이 악의와 뒤섞여 근육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팔을 휘두르자마자 터진 H의 짧은 비명과 함께 놀란 부모님이 달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벼락같은 호통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엄마가 H를 감싸 안고,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힘이 풀려 놓친 배트가 떨어지며 발등을 찍었다. 쓰러지듯 주저앉아 올려다본 H의 눈가에는 뜻밖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엄마 형이, 형이… 난 가만히 있었는데…….”

 엄마는 끔찍하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점점 거세지는 도리질 끝에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대체 왜 그래, 왜! 지긋지긋해, 이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이번엔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픈 발등도 잊을 만큼 황황해 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웃음이 터졌다. 그들이 나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았지만 웃음은 발작처럼 그치지 않았다. 조악한 연극 세트를 보는 것 같았다.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H도, 경멸 섞인 눈동자가 H가 아닌 내게 향해 있는 이 상황도. 견고하게 쌓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발밑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는 쟤가 안 이상해?” 
 “…….”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아빠가 뭐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곧장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 자식이, 이거 당장 열지 못해? 쫓아온 아빠가 문을 덜컥거리며 소리쳤다. 엄마가 창고에서 방문 열쇠를 찾아오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도망쳐야 했다. 책가방 안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 버리고, 책장 깊숙한 곳에 숨겨뒀던 관찰 일기를 쓸어 담은 뒤 책상 위 아빠의 라이터와 지갑을 훔쳐 창문으로 달아났다.

 한참 뛰어서 온 곳이 겨우 학교였다. 이제 다 자랐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어디 멀리 가본 적도 없는 어리숙한 중학생에 불과했다. 아무도 없는 학교 가장자리를 뱅뱅 돌다가 운동장 구석에 앉아 일기를 꺼냈다. 어설프게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고 또 끅끅 웃었다. 인생 최초의 절망이라는 게 H의 갱생이라니. 우스웠으나 이번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H는 구제 불능이었다. 제멋대로 사고를 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빽빽 소리를 질렀다.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결국 차례차례 H를 포기했다. 나는 그 옆에 있기만 하면 됐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든 칭찬은 내게 돌아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뺨을 적시고 입 안을 붓게 만들 만큼 울었는데도 계속해서 솟아났다. 무너진 발밑으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움켜쥔 바닥의 모래는 새까만 하늘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낮 동안 받았던 햇빛이 사라지자마자 식는 온기는 얼마나 매정한가. 비겁하고 평탄했던 인생이 꼬였음을 자각했다. 짓밟을 디딤돌이 사라진 나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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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서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빈손으로 나와 아직도 빈손으로 살고있는 우리는 20대 입니다.
요즘 우리는 정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책임을 배우고 그 또한 인지하고 있지만
무책임이 부도덕과 악의 싹이 될수있음은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덕과 정의의 문제는 당장의 선택이기 때문에 중간이 없을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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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여기에 자그마한 소설을 연재해보면 어떨까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을 훔쳐보다 보면, 훔쳐만 보기엔 아까운 뒷 이야기들이 그려질때가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건 그렇고 혹시 마크다운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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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저장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