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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소

 햇살이 쏟아지는 날. 푸르른 풀잎들도 하얗게 보이던 날. 그녀는 단 한 톨의 세상도 담겨있지 않은 하얀 재가 되었다. 완전히 연소되어 티끌만큼의 검댕도 남지 않은, 햇빛처럼 눈이 부시도록 하얀 재가 되었다.


 그녀는 햇볕이 쏟아지는 날 그저 그곳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해를 바라보는 그녀는 그저 한 송이의 해바라기와도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온몸을 덮는 햇살을 탐닉했다. 눈을 뜬 그녀가 나를 돌아보는 순간 알 수 없는 떨림에 나는 그만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녀는 햇살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안녕"


 그 날 이후 나는 그 공원을 찾아갔다. 그녀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눈을 감고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을 때쯤 나를 돌아봤다.


 "안녕."


 그녀는 붉은 얼굴과는 다르게 푸르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그녀는 푸르렀다.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붉음은 오로지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비롯한 얼굴뿐. 그녀는 마치 햇빛으로 자신의 푸르름을 씻어내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하고 있냐는 말에 그녀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시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햇살이 좋아서."


 매일 공원으로 찾아오는 내게 그녀는 언제나 푸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푸르다 못해 청량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는 언제나 햇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햇살을 받으면 그제야 심장이 뛰는 것 같아. 봐봐. 심장이 뛰니까 얼굴이 붉어지지? 사람은 햇살을 받아야 돼. 그래야 살아있는 거야."


 "햇살을 온몸에 쬐면 내가 정화가 되는 느낌이야. 몸 곳곳에 있는 더러움이 다 산화되는 것 같아."


 "그거 알아? 사람은 햇살을 받아야 몸에서 비타민 D를 합성한대. 그래서 햇살을 받지 않으면 지치고 우울해지는거래. 신기하지 않아?"


 "햇살은 아무것도 없는 우주를 지나서 지구까지 도달을 해.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니 나는 상상조차 안 돼. 아무것도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어느 날 찾아간 공원에서 눈이 부시도록 흰 옷을 입은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충만한 햇빛을 받아도 더이상 붉어지지 않는 그녀의 볼은 마치 얼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내 소원은 햇살이 되는거야."


수줍게 키득이며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나도 햇살처럼 깨끗해지면 좋겠어. 눈이 부시도록 빛나면 좋겠어.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햇살처럼 아무것도 없는 우주마저 지나올 수 있을 것 같아."


 말을 마친 그녀는 내 손에 흰 쪽지를 쥐어주곤 떠났다. 하얀 쪽지에는 그녀처럼 푸르름이 묻어있었다.


 쪽지에 적혀있던 날, 쪽지에 적혀있던 장소에서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마지막 만났던 날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햇살처럼 빛나게 웃으며 그녀는 말했다.


 "난 이제 햇살이 될거야. 햇살이 되면 눈이 부시도록 빛나겠지. 햇살이 된 나는 어두운 우주를 지나서 싱그러운 이 지구에 도달할 수 있어."


 그녀는 연소했다. 그녀는 완벽하게 깨끗하고 새하얀 한 줌의 햇살이 되어 태양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찾아간 공원에서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제 막 우주를 지나온 햇살들이 가득 쏟아진다. 시리게 빛나는 햇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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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그녀

주말이 다가오는 어느 날 저녁, 야근때문에 회사에 남아있었다. 일, 일, 일.. 누가 보면 지긋지긋하지도 않냐고 물어볼테지만 내겐 이만큼 멋진 생활은 없다. 커리어를 쌓고 자기만족에 충만한 삶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계속된 야근 탓에 몰려오는 잠을 깨우려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중이었다.
"하얀 빛이~ 가득 퍼지는 어느 봄 날엔~"
티비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티비를 바라보던 나는 평소의 냉철한 표정이 무너지려 했다. 부리나케 나답지 않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아..하아..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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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보다 볼때마다 맑은 느낌이 나 그 아이 곁을 지나갈때면 자꾸 눈길이 갔다. 멀리서도 환해보인다는 말이 있던가? 그말처럼 그 멀리서도 빛이 나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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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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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푸리지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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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함' 이란 단어가 오직 그녀만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달빛이 잘게 부서져 내린 듯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그 달을 따다 놓은 것 마냥 깊고 은은한 눈동자가 그저 좋았다.
 '아아, 앞이 보이지 않아.'
 그녀의 모습이 내 눈을 멀게 할지라도, 좋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결코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녀를 어찌 대하고 생각하던 간에 난 그녀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심장을 잃었다 했던가. 감정 표현을 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 말따마나 지금까지 그녀의 웃음을 본 적이 없다. 슬프게도.
 그녀가 나에게도 같은 감정을 가지기를 바라진 않겠다. 그저 단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웃는 얼굴이 보고싶었다.
 굳어있는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게 보고싶다. 살풋 접히는 눈가가 보고싶다.
 내 심장을 바쳐서라도, 그렇게라도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더이상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으리라.
 그녀의 미소는, 나에게 있어 그렇게나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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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그녀는 항상 일요일이 되면 이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언제는 책을 읽을 때도 있고 또, 언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음악을 들을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커피는 카페 마키아토를 마신다.
그녀와 처음 대화를 나눈 건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 일요일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우리 카페의 손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해외유학 중 만난 점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출근한 이후로는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처음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사교성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 덕에 잦은 전학에서도 어렵지않게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유학 생활도 외롭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져 주변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아프냐는 질문에도 힘겹게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게 최선이었다.
그 일이 있고 정확히 다음 주 일요일.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도 심장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보다 진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곧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들 때, 주문은 하지 않냐는 점장님의 말에 깜빡 잊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와서는
라고 슬며시 물어봤다. 심장은 멀쩡해도 여전히 떨렸던 탓에 이번에도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라떼아트를 구경하며 점장님과 함께 수다를 떨었고 나는 내가 그릴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을 그렸다.
그 후로도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그녀를 위해 그림을 그렸고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그녀는 항상 웃음으로 답했고 나는 그게 좋았다.
한 번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그녀가 걱정이 되어서 점장님께 여쭤보니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카페에 오던 도중에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그리고 몇 주간 그녀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 그린 그림이 백여 개가 될 즈음에 그녀가 찾아왔다.
변함없는 그녀의 웃음은 한 순간만에 나의 걱정을 날려버렸다. 괜찮냐는 한마디 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 놓고서는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는 대답 대신에 슬며시 웃어 보였다. 
매일 내가 그려 놓은 라떼아트를 점장님께서 휴대폰으로 찍어 보냈다고 하셨다. 어떻게 그녀의 번호를알고있냐고 물어보니 점장님과 그녀는 남매 사이였다. 나의 사정을 알고서는 카페에 나오지 않는 동안 수화를 배우러 다녔다고 했다.

그녀와 처음으로 인사할 일요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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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얼굴은 기억이 나지않지만
키는 나보다 10센치정도 작은것 같았다.
목소리로 보아 여자였다.
작고 귀여운 느낌.
그녀는 상냥했다.
나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나는 사랑에 크게 데인 기억에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한결같이 다정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랑받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겁이 났지만
나에게 한없이 다정한 그녀가 좋았다.
결국 그녀의 따스한 품에 안겼다.
얼마 지나지않아 꿈에서 깼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그러나 아쉽지는 않다.
덕분에 행복한 아침을 맞았고
덕분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느껴본 따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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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대, 나와 눈을 마주하고 미소지어주오.
부유하던 공기가 멈추고 시간마저 흐르지 않는 순간이었다. 
햇살은 당신 머리위에 내려앉았고, 따스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펄떡이는 심장이 노래가 되었고 마주한 얼굴이 악보가 되었다.
그대는 나와 같을까?
우리는 공간을 공유하지만 같은 감정을 가지지 않아서, 나는 두 눈에 홀로 당신을 새긴다. 
눈부신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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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과 연습실 B-3

“꿈은 보통 황당한 내용이 많지.”

납작한 토슈즈가 바닥을 툭툭 두드린다. 죽어 누워있는 나무들은 기름을 먹어 매끈했다. 

“…하지만 그래서 꿈인거야.”

살해당한 나무들이 잘리고 가공되어 이 연습실의 마룻바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했다. 오후 다섯 시. 비스듬한 햇빛이 유리로 된 벽을 뚫고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한 번도 행복한 꿈을 꿔 본 적이 없어.”

나뭇결을 따라가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발 끝으로 돌아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 그 위로 쭉 뻗은 다리를 감싼 얇은 검은색 레깅스. 짧은 워머티가 미처 가리지 못한 배꼽. 골반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잘록한 허리. 어깨를 위로 움츠리면 물이 담길듯한 깊은 쇄골. 사슴처럼 여린 목과 아름다운 얼굴.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졌다. 나는 무언가, 그녀의 이야기에 끼어들 문장을 찾고 있었다. 무척 신중하게. 아무 단어나 주워 내뱉는 것은 그녀가 나에게 가진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을 때,

“만약… 네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한 꿈이겠지.”

나는 마음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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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안녕하세요."
 길 모퉁이 식당 앞을 지나치며 본 그 붉은 치마의 여성은 몇초만에 나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게 아름다웠다. 붉은 치마와는 대조되게 푸른 눈동자와, 옷과 조화를 이루는 빨간 입술, 투명하게 빛나는 하얀 피부. 모든 것이 한데 섞여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녀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다가와 인사를 건네면 내가 생각해보아도 수상한 사람일것이라는 느낌이 먼저 와 닿을것 같았다. 그렇기에 발 걸음소리를 줄여, 등 뒤에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기는 커녕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 거절당하고 나니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려고 했는데,
"비키세요!"
 그녀 앞으로 웬 빨간 자전거 한대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정말로 그녀는 다른 곳에 한눈 팔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건넸던 인사처럼 자전거를 몰던 사람의 말도 듣지 못했다보다. 생각보다 가녀렸던 그녀는 자전거에 살짝 치여 카드탑이 쓰러지듯 가볍게 넘어졌다. 
"괜찮으세요?"
 그녀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 한 마디가 인사가 아니게 되었지만 우선은 이 가녀린 여인을 부축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내 손을 잡고 고맙다는 뜻(으로 해석하겠다)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넘어지는 바람에 살짝 헝클어진 머리가 어디선가 불어온 하늘의 입김에 나풀거렸다. 미소를 지으며 살짝 감은 눈은 꽃잎 두 장이 겹쳐진 것 같았다. 잠시동안 그녀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자니 마음이 황홀해지는 듯 하였다. 그때였다.
 "아씨 괜찮으십니까!"
 건너편 도로에서 작은 마차 하나가 길에 멈춰서더니 뚱뚱하고 머리가 희끄무레한 한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는 이쪽을 쳐다보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어 소리치며 달려왔다. 
"아이고 아씨.. 부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저희 아씨가 조금 몸이 연약합니다. "
"아닙니다. 그저 아름다우신 분의 얼굴에 흠집이라도 날까 하여 도와드린것 뿐입니다. 클레어라고 불러주십시오."
"클레어 아가씨.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해주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 몇 명을 마차에서 불러 그녀를 부축해갔다. 
"아, 저 한가지 질문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질문이시죠?"
"아씨께서 제가 인사를 드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
"아아.
저희 아씨께서는 목소리가 들리지도, 나오지도 않으십니다.

"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는 언덕 너머의 작은 오두막에서 요양중이라고 하였다.전에 나들이 갔다 본 적이 있는 집이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에 생각했다. 다음에 아씨께 가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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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는 조심히 칼을 꺼냈다. 그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그녀는 더 울었다. 눈물이 그저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칼로 그 남자를 겨눌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건 그녀였다.
"아....."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다. 입에서는 가느다랗게 탄식이 흘러 나왔다.
"무엇을 망설이는 건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나, 나는....."
"그래, 이대로 너에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그는 그저 옅게 웃었다. 물론 당대 최고의 무신인 그가, 고작해야 고아 소녀의 칼질 몇 번에 목숨을 잃을 리는 만무했다. 허나 그는, 자신 앞의 소녀가 원한다면 그래주고 싶었다. 그것이 연정이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언제 피어난 건지도 모를 단 하나의 작디 작은 감정이, 어느 감정보다도 더 그를 움직였다. 여태까지 이랬던 적이 없기에, 그는 궁금해졌다. 연정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리도 나를 움직이는가. 이래선 안 되는데, 점점 충동이 그의 몸을 감쌌다.
".....!"
결국 충동이 이성을 이겼다. 그가 달려가 그녀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그녀가 너무 놀라 헛숨을 삼켰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더 세게 끌어안기만 했다. 소녀의 손에서 칼이,
투우욱
떨어졌다. 소녀의 손이 올라갔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껴안았다.
"...미안하다."
그가 보니 그 여린 소녀는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숨죽여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 여린 아이가 흐느끼는 이유가 자신 때문일지도 모르기에 마음이 아파서 그는 사과했다. 끌어안은 손은 누구도 놓지 않은 상태였다. 
"..흑..으흑..."
그 소녀의 흐느낌이 자신의 마음을 후벼 팠다. 적군에게 팔이 잘리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탄식을 삼켰다. 눈이 내리던 날. 외로웠던 무신과 곁에 아무도 없었던 소녀는 서로를 오랫동안 품에 안았다.
이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