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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식욕

늘 맛있게 내려주는 커피만큼 괜찮을 줄 알았던 녹차는 기대보다 텁텁했다. 여기는 앞으로 커피만 시켜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던 책을 펼쳤다.

소설은 아직 초반부였으나 주인공은 벌써 사람을 세 명이나 죽였다. 발 앞의 난도질 당한 시신. 기분 나쁜 온기가 남아있는 핏물. 뱃속 깊숙이 박혀 잘 빠지지 않는 칼을 부득부득 빼내는 묘사에 식욕이 완전히 달아났다.


“사람 죽인 적 있어요? ”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한 여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아는 여자다. 맨 윗층에 사는, 집주인의 딸.


“있으면 여기서 커피는 못 마시겠지.”


최대한 억양을 덜어내고 대답했다. 목소리에 자칫 온기나 냉기가 묻어나지 않도록. 목덜미처럼 드러난 감정만큼 손쉬운 먹잇감은 없기 때문이다.

여자의 시선이 나에게서 내가 들고 있는 책 표지로 옮겨갔다. 핥는 듯한 시선에서 나른한 전의를 느꼈다.


“매일 이런 것만 읽길래, 연구라도 하는 줄 알았죠. 제목에 들어가는 단어부터 그렇잖아. 사건, 살인, 시체, 죽음.”


여자가 책 제목으로 나를 찌르는 동안 나는 그녀의 흰 살결을 본다. 푸른색 셔츠 깃 위로 뻗은 가느다란 목. 두 손으로 잡고 누르면 툭 부러지지 않을까.

누군가 토스트를 주문했는지 카페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문득 고개를 든 식욕이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어디서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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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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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만남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그럼 어떻게 먹고 사세요? 내 무례하고 유치한 공격에 남자도 진부한 답변을 했다. 꿈을 먹고 살지요. 여전히 미소가 마르지 않은 가벼운 얼굴이 속을 답답하게 했다. 오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꿈이 선생님의 밀린 전기세를 해결해 주지는 않잖아요. 그러자 그의 웃음이 진해진다. 그래서 요즘 양초를 켜요. 생각보다 쓸만합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피웠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비수처럼 던져뒀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하다. 짐승을 찌를만큼 날카롭게 갈아낸 칼날도 그의 가죽은 뚫지 못할 것이다.
허탈함이 지나간 뒤 따라온 건 졌다는 느낌이었다. 찻잔 끝에 말라붙은 커피의 색은 내 패배감과 같았다. 그러나 패인은 생각보다 뾰족했다. 내게는 맹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2 2

통증


꿈속에서도 나는 자주 넘어졌다. 아니 쓰러졌다. 인생을 전부 잡아먹은 깊은 병증은 꿈까지 따라와 발목을 잡았다. 도피할 곳이 없었다. 잠시 잊을 수 있는 아주 조금의 틈조차.

지긋지긋해. 잠에서 깨면 그런 말부터 시작했다. 염증으로 불거져 나온 혈관만큼 검붉은 불평들이 입 밖으로 툭 툭 떨어졌다. 그러면 형은 언제나 말없이 그것들을 주웠다. 통증에 절어 신음처럼 가늘어진 목소리를 어깨에 둘렀다.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빼곡히 찔러 넣었다. 그렇게 무수히 반복되어 이제 더 이상 꽂힐 공간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형은 잔잔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게 지독하고 수치스러웠다. 형을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그의 살점을 메마른 입 안 가득히 뜯어 먹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렇게 내 치부와도 같아진 행위의 반복만이 하루를 채웠다.
3 3

고백

 죄를 고백하는 것은 쉬웠다.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내 입을 막고 있었던 것은 가볍고 얄팍한 윤리 의식뿐이었으니까. 도덕책에서 배워 누구나 알고는 있는, 그래서 누군가에겐 경계고 벽이었으나, 나에게는 축축하게 젖어 언제든 찢어버릴 수 있는 종이에 불과했던. 그런 물기 고인 의식들.
 “…가출하고 소식이 끊겼던 Y, 이 년 전 실종된 A, 작년 봄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H.”
 아득할 만큼 멀었던 과거에서부터 시작했던 고백은 어느새 현재에 가까워져 있었다. 새파란 얼굴을 하고 부들부들 떨던 P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겁에 질린 개처럼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팔을 잡아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직이야. 아직 남았어.”
 “이… 이거 놔.”
 “작년 뉴스 일 면에 실렸던 연쇄 토막 살인 사건.”
 “놓으라고…!”
 P는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비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까부터 점차 퍼지던 미소는 어느새 완전한 웃음이 되어 있었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목젖 아래서부터 끓어 넘쳤다.
 언제나 열망했다. 내 죄를 고백하는 나를 상상했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팔을 붙들고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죽였다고. 내가 한 짓이라고.
 “쓰레기…, 쓰레기 같은 새끼! 네가 사람이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게 의아했다. 왜 울지. 아직 제일 중요한 건 꺼내지도 않았는데.
 “내가 작년에 준 화분 기억나?”
 “…뭐?”
 앞뒤 없이 튀어나온 이야기에 P가 좁혔던 미간을 올렸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속삭였다. 
 “J는.”
 단지 이름 하나. 그 한 명의 이름으로 그녀의 모든 것이 멎었다. 몸부림치던 동작, 눈물, 목소리, 울음에 차 가늘게 떨리던 호흡마저. 마치 혼자 정지된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꼭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기억해?”
 크게 벌린 입가가 이내 일그러진다. 얼굴 위로 떠오른 것은 절망이었다. 그녀는 내가 바라던 대로 어떤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거든.”
 손을 놓자마자 P는 당장 거실로 내달렸다. 참기 어려울 만큼 뜨거운 감정이 가슴 한가운데를 터뜨렸다. 붕 떠오르는 것들을 애써 가라앉히며 방을 빠져나오자 마침 제 무릎까지 오는 화분을 들고 선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쉽게 던지지 못한다. 두려우니까. 그러나 팔은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도기로 된 하얀 화분은 산산이 깨어졌다. 폭발하듯 흩어지는 산세비리아 사이로 흙투성이가 된 무언가가 밖으로 굴러 나왔다. 꼭 사람 머리처럼 생긴.
 P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가슴을 움켜쥔 채 곧 죽어버릴 짐승처럼 숨을 헐떡이다, 이내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터져 나오는 쾌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여전히 오열하고 있었고, 나는 주방으로 가 식칼을 집어 들었다.
2 4

새내기

가을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더운 건지. 추울까 일부러 챙겨온 블루종은 금세 귀찮은 짐이 되었다. 그늘이 있는 곳으로만 골라 걷다가 도서관에서 막 나오는 J와 마주쳤다. 녀석은 인사도 없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우와, 너 땀났어.”

그렇게 얇게 입고서 더워? 가디건 주머니에서 꺼낸 휴지로 내 콧잔등을 닦아주는 J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뭐 좋은 일 있냐? 툭 물어보니 배시시 웃는다.

“오다가 선물 받았거든. 보여줄게, 있어 봐.”

그러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열어 열심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금방 꺼내 보여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속이 얼마나 난장판인지 이미 여러 번 목격했던 나는 잔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야, 넌 제발 가방 정리 좀 해. 니가 도라에몽이냐.”
“내 라이프 스타일이야.”
“뭐? 그건 그냥 쓰레기장 스타일이야. 너 가방에서 봤던 것 중에 제일 황당했던 게 뭔 줄 알아? 탁상에 놓는 알람시계. 대체 그걸 왜 들고 다니냐고.”
“살다 보면 다 필요할 때가 오거든?”
“아니 핸드폰에 손목시계까지 꼬박꼬박 차고 다니면서 무슨…”
“찾았다! 선물!”

티격태격하는 동안 녀석이 선물을 발굴해냈다. 번쩍 꺼내 든 손에는 제과점에서 팔 법한 캔디 깡통이 들려 있었다. 그게 웬 거야?

“오다가 새터 앞에서 K오빠 마주쳤거든. 알바하다가 남아서 받았는데 자기는 단 거 안 좋아한다고 주시던데.”

아. 너무 뻔하다. 그런데 이렇게 빤히 보이는 걸 지금 이 멍청이만 모르고 있다. J는 신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노란색 사탕을 골라 세 개나 입에 넣었다. 저거저거 충치 걸려봐야 정신 차리지. 속으로 혀를 차는데 J가 내 쪽으로 깡통을 쑥 내밀었다. 먹을래? 알록달록한 사탕이 한가득 들어 있는 통 안이 한없이 발랄해 보였다. 이 녀석 머릿속이 아마 이런 색이지 않을까. 나는 포도 맛으로 보이는 보라색 사탕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그 오빠 너 좋아해.”
“헐… 설마.”
“야, 말해두지만. 복학생은 안 돼.”

그러자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인마, 난 진지해. 다른 놈은 몰라도 그 오빠처럼 속 시꺼먼 복학생은 안 된다고. 다리로 툭툭 차대자 웃음이 더 높아진다. 햇빛을 베어 문 듯 눈부신 웃음 사이로 라임 향이 났다.
1 3
Square

다이어트 2 단계

다이어트 2 단계. 
카메라 촬영후, 충격 받아 급시작했던 다요트.
2 단계로 접어 들었다.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된다.


1단계 마무리를 축하하며, 
씨푸드 뷔페로 배를 두둑히 불렸고, 
스트로베리 무스 리코타 치즈 케익과 바삭 바삭한 씨리얼을 넣은 요거트 아이스크림 디저트 까지 먹었다.
문제는 그 다음날.
그러고나니, 식단 조절할 때 느끼지 않던 식욕이 돈다. 
-_-;

랍스터를 생각하며 참아야지.
2 1

댄스댄스 下

 4.
 “양쪽 고막에 천공이 생겼어요. 구멍이 커서 자연 치유는 안 되겠네요. 방치하면 전음성 난청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럼, 아예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건가요?”
 “방치하면요. 간단한 수술만 받으면 회복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가 한 시간 내외로 걸리는 아주 간단한 시술이라고 덧붙였지만 그 말은 곧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난청. 그 단어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혹은 구명정의 마지막 자리처럼 안도감 있게 들렸다.
 “고소는 안 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B는 생각만큼 많이 다치지 않았다. 옆구리를 가볍게 스친 정도였다. 큰아버지는 나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서류의 사인과 앞으로 서게 될 법정에서 고분고분히 있는 것. 나는 건네받은 캔커피를 그의 코에 들이붓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왜 안 해요. 그러면 제가 고마워할 것 같아서?”
 “네가 잠깐 돌아서 행패를 부리긴 했지만,”
 행패라니. 마치 B가 남의 장례식장에서 한 짓은 행패가 아니라는 투였다.
 “그래도 나는 널 아직 내 자식처럼 생각한다.”
 “큰아빠.”
 “그럴 수 있어.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상심이 크냐. 그래도 도가 지나쳤다.”
 “도요? 먼저 도를 넘은 건 큰아빠 자식이죠! 제가 아니라요!”
 결국 캔을 집어던지고 자리를 떴다. 깡, 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마음을 우그러트렸다. 모든 것이 끔찍했다.
 5.
 부산행 KTX 표를 끊었다. 살면서 한 번도 여행한 적이 없었다. 학교 소풍이나 수학여행도 전부 빠졌다. 그런 주제에 엄두를 낸 것은 예상보다 빠르게 꺼져가는 청력 덕분이었다. 거기에 말랑말랑한 메모리폼 재질의 귀마개가 용기를 보탰다. 괜찮을 거야. 기차 타자마자 눈 감고 자면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부산에는 삼촌이 있었다. 엄마와 이모들이 업어서 키웠다고 버릇처럼 얘기했던 집안의 늦둥이이자 나의 유일한 친구인 막내 삼촌이. 그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재작년에 회사 발령으로 부산에 내려갔다. 장례식 때는 난장판이라 경황이 없었으니 제대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뜬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독한 가위에 눌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플랫폼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그동안 겪었던 모든 멸시와 환난이 거기에 있었다. 두려움이 두 발을 휘감고 구렁이처럼 올라와 숨통을 조였다. 조금씩 어두워지던 시야는 곧 암흑천지로 변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정오를 넘긴 후였다. 이미 출발 시각이 한참 지났으니 표를 취소할 필요도 없었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순서대로 꽂혀있는 책들.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는 물건들. 그들은 나에게 달려들거나 해코지하지 않는다. 내게 안전한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소음도 허용하지 않는 8평짜리 내 방. 아무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고, 나도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무언가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문을 걸어 잠그고 서랍에서 테이프를 꺼내 방문을 따라 물 샐 틈 없이 몇 겹으로 붙였다. 나는 여기서, 우북하게 자라나는 침묵에 파묻혀 죽을 것이다.
 6.
 밖에서 매도당해 뒈지는 것보다는 혼자 곱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나 그 숨 막히는 평온함도 얼마 못 가 끝났다. 세상은 나를 가만히 두는 법이 없고 틈만 나면 불행을 뒤집어씌우기 좋아하는 저질, 변태, 개자식이었다. 오래 방치했던 핸드폰을 손에 쥔 게 화근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백몇 통, 문자도 오십몇 개. 그중에 큰아빠와 이모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삼촌이었다. 산사태의 잔해처럼 쌓인 문자들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너 왜 연락이 안 돼. 걱정되니까 답장이라도 해. 삼촌 진짜 서울 올라간다. 올라가는 중이다. 거의 다 왔어. 전화 진짜 안 받아? 여기까지 읽고 숨을 들이켰는데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삼촌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삼촌?”
 “야!! 너 대체 뭐하다 이제 받아!”
 “진짜 왔어? 회사는?”
 “……지금 문 앞이야. 얼른 열어, 얼굴 좀 보자.”
 삼촌은 내가 망설이는 낌새를 느꼈는지 당장 열지 않으면 부술 기세로 문을 두드렸다. 방 안이라 들리지는 않았지만 수화기 너머 나는 소리로 짐작건대 아예 발로 차는 듯했다. 나는 그가 한때 격투기에 심취해 아마추어 대회까지 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열 테니까 그만하라고 소리를 빽 지르고 나서야 살벌한 소리가 멈췄다. 테이프를 뜯어내고 방 밖으로 나가 대문 도어락을 풀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아이고, 얼굴이 왜 이렇게 반쪽이 됐어.”
 잠깐 성난 곰 같았던 얼굴은 나를 보자마자 미어캣으로 변하더니 이내 비 맞은 퍼그처럼 불쌍해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삼촌. 울지 마.” 
 “안 울어, 마.”
 하하. 가벼운 웃음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문득 이렇게 웃은 게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낮에 손톱만 한 초승달을 발견한 것처럼 생경했다. 삼촌은 괜찮다는 데도 기어이 배달되는 한식점을 찾아 음식을 시켰다. 우리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삼촌은 누나가, 우리 엄마가 꿈에 나왔다고 했다.
 “너 살 빠진 거 나보고 도로 찌워놓고 가랬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감정이 가슴께로 밀려와 울렁였다. 두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이제 보니 삼촌도 얼굴이 많이 상했다. 예전에는 항상 멀끔해서 반질반질한 사과 같은 인상이었는데. 눈 밑으로 거뭇하게 그늘이 지고 볼이 옴폭 들어간 데다 턱 위로 꺼칠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삼촌. 나 난청이래.”
 “뭐?”
 “수술하면 괜찮대. 근데 나는 그러기가 싫어.”
 “…….”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삼촌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아니, 미안. 보통 고등학생이 그러면 건방지다고 할 텐데, 니가 그러니까… 뭐라고 못 하겠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배달 음식이 왔다. 삼촌은 손수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 나머지 반찬들을 꺼내어 식탁에 놓고 랩을 벗겨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일하던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냐고 물어서, 내가 잘랐다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삼촌은 이유를 물으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따끈한 백반을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많이 먹어.”
 삼촌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도 딱히 식욕은 없어 보였는데 일부러 먹성 좋게 먹는 것 같았다. 나도 마지못해 한술 떴다. 생존의 이유를 잃어가는 이에게 식사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다. 깨작거리며 어느 정도 먹었을 때 삼촌이 머뭇머뭇 이야기를 꺼냈다. 있잖아, 염치없는 얘기인 건 아는데.
 “삼촌이 요즘 힘들어.”
 “…….”
 “빚이… 좀 생겼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식탁 위에 놓인 삼촌의 손을 잡아 토닥였다. 얘기해봐, 얼만데. 삼촌은 어두운 얼굴로 나를 흘끔 보고는 다시 아래로 시선을 떨궜다.
 “팔천만 원.”
 “팔천만 원?”
 “사실 회사 때려치운 지 좀 됐어. 친구랑 사업하려고 했거든. 근데 그놈이 돈만 들고 날라버려서….”
 팔천. 일 문제로 통화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훨씬 높은 금액이 쉽게 오갔던 걸 떠올렸지만 그 규모가 선뜻 와닿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미성년자였고, 내 손으로 돈 한 푼 벌어본 적 없는 어린애였다. 가늠할 수 없는 일에 망설이는 동시에 선뜻 삼촌을 잡아주지 못하는 내가 호래자식처럼 느껴졌다.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된 나에게는 삼촌이 마지막 남은 버팀목이었다. 삼촌이 내 손을 꽉 잡았다.
 “한 번만 도와줘. 삼촌이 꼭 갚을게.”
 그의 진심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삼촌이 나에게 얼마나 잘 해주었는가. 그러나 나는 보았다. 삼촌의 눈동자가 발하는 어두운 빛을. 희미하게 비틀린 입가에 고인 탐욕을. 피식자 특유의 예민한 본능이 내가 그것을 알아보게 했다. 그건 큰아버지와 똑같은 짐승의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게 삼촌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
 삼촌은 얼어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매정히 내칠 수 있냐고 말하는 듯한 피해자의 얼굴을 했다.
 “미안. 내가… 내가 다시 연락할게. 오늘은 그냥 가줘.”
 그는 다시 손을 잡으려다 실패하자 허리를 껴안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땡땡아, 제발, 제발 한 번만 도와줘. 너밖에 없어. 균형을 잃고 휘저은 팔에 의자가 쓰러지고 식탁의 그릇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삼촌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집히는 그릇 아무거나 손에 쥐고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거 놔, 나가, 나가라고, 나가!!”
 있는 힘을 다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겨우 그를 쫓아낸 뒤 다시 고요해진 집은 어느 때보다 난장판이었다. 고여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 안 가 둘째 이모에게 삼촌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너한테까지 가서 행패 부렸다며? 이모가 대신 사과할게. 이모는 담배를 태우는지 깊게 숨을 내쉬고는 자세한 얘기를 해줬다. 글쎄 걔가 진 빚이 죄다 노름빚이더라고. 부산에서 밤낮 도박장 드나들다가 회사 잘리고 돈도 날리고 나중엔 사채 끌어다 처박았댄다. 도박에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지금은 내가 병원에 겨우 입원시켰어. 애가 아주 성실하지는 않았어도 한량은 아니었는데 막내라 너무 오냐오냐 키웠는지……. 얘, 넌 별일 없지? 이모는 덕분에 흰머리 왕창 나서 할머니 다 됐잖니. 깔깔깔.
 7.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잡을 지푸라기마저 사라진 기분은 참혹했다. 큰아버지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나에게 갖은 농간을 부렸다. 번지르르한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에게 완전히 질린 나는 내가 죽더라도 이 인간에게만큼은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모순적이게도 큰아버지의 존재가 나에게 살아갈 힘을 준 것이다. 관련 법을 공부하고 아버지와 연이 있던 변호사에게 연락을 넣어 상담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그간 받았던 겁과 사탕이 같잖은 협잡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아버지는 소송에서 졌다. 법원은 제삼자인 변호사를 후견인으로 선임했다. 소송을 건 큰아버지를 포함해 친척 중 재산을 욕심낼만한 이들이 많으니 당연한 판결이었다. 물려받은 재산과 사망보험금은 내가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신탁에 맡길 거고, 그렇게 되면 누구도 내 재산에 눈독을 들일 수 없게 된다.
 
 “잘 끝났는데 표정이 왜 그래요?”
 법원을 나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변호사는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난청이 상당히 진행되어서, 이제 반 정도는 입 모양을 읽어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얼굴 펴고, 어깨도 펴고. 나중에 내 나이 되면 고생해.”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올려 웃으니 과연 좀 나았다. 문득 올려다본 법원 건물 위로 회색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 때마다 헐벗은 나무들이 춤을 췄다. 코트를 더 단단히 여미고 귀 위로 털 달린 귀마개를 덮어 썼다. 그녀가 품에서 차 키를 꺼내면서 물었다.
 “집까지 태워다 줄까요? 추운데.”
 “아, 아뇨. 택시 타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해요.”
 시내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려다 음악이라도 틀었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들어 일단 걷기로 했다. 평일 낮인 데다 날씨가 추워서 거리는 한산했다. 상가가 없는 쪽으로 돌아가다가 아파트 단지를 질러 집으로 가면 음악도 마주칠 일 없고 안전하겠지. 아무튼 별 탈 없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밤마다 법정에서 춤추는 악몽에 시달리는 바람에 심적으로 더 힘들었다.
 “야.”
 마음 놓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던가. 별안간 귀마개가 벗겨졌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큰아버지가 내 귀마개를 들고 서 있었다. 카악, 퉤. 그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꼭 얼굴에 침이 튄 것처럼 아주 더럽고 모욕적이었다.
 “끝이라고 착각하지 마. 내 새끼한테 그런 짓 하고도 발 뻗고 잘 수 있을 줄 알아?”
 그는 흉악한 표정으로 귀마개를 반대로 꺾어 부러트린 뒤 바닥에 내던졌다. 내 다리를 저렇게 부러트리고 싶은 거겠지. 나는 정말로 지긋지긋해졌다. 이미 지독히 덧난 염증이 곪아 터져 고름이 흐를 지경이었다. 
 “예전에 아빠가 빌려준 것도 다 말아 먹었으면서.”
 “뭐야? 그건 어른들끼리 애저녁에 다 끝난 얘기야!”
 “큰아빠 사업병 있는 거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알아요! 그런데 후견인은 무슨, 이 사기꾼 새끼야!”
 그는 참지 못하고 내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부진 그를 힘으로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살면서 크고 작은 싸움에 자주 휘말렸기 때문에 맷집만은 좋은 편이었다. 여러 대 맞은 뒤 옷자락을 붙잡고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그의 고간을 걷어차고 도망쳤다. 억!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는 큰아버지를 뒤로한 채 무작정 달렸다. 긴 이명이 산발적으로 양 귀에서 울려 몇 번이고 벽에 몸을 부딪쳤다. 방향도 모르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가쁜 숨이 터질 때까지, 다리가 완전히 지쳐 멈출 때까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다리 위였다. 세찬 칼바람 사이로 눈이 흩날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파도 못지않은 세찬 물결이 넘실거리며 다리기둥에 부딪혀 부서졌다. 이런 날 물에 뛰어들면 적어도 저체온증으로 죽지 않을까? 그 물음을 시작으로 생각해봤자 소용없는 소모적인 가정들이, 여태 결론 내리기를 보류했던 질문들이 상처 틈새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어딘가 돌이킬 지점이 있지 않았을까.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부모님은 나를 버린 게 아닐까. 내게 드디어 오만 정이 떨어져 사고를 위장하고 도망가버린 게 아닐까. 시신까지 내 눈으로 다 확인했으면서. 이제 어떤 사소한 일상도 공유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흑, 참지 못하고 흐느끼던 그때였다.
 “…….”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먹은 것처럼 고요했다. 어깨 위로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8.
 침묵하는 세상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랜 풍파 끝에 맞이한 평온함과 함께 막막한 바다에 표류한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올곧게 나아갈 이정표가 필요했다. 언젠가 한 소설가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 종이를 놓고 펜을 들자마자 원래 그렇게 약속되어 있었던 것처럼 손이 움직였다. 단어가, 문장이, 나를 이루는 모든 기억이 낱낱이 춤을 추었다. 첫 문장은 이런 글이 흔히 그렇듯 자신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나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음악이 들리면 몸이 멋대로 춤을 추는 병이다. 웃지 마라. 이것은 아주 좆같은 일이다. 나는 가족, 이웃, 선생님, 같은 반 아이들, 그 외 길 가던 행인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면서 자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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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감기

베개를 끌어안자 더운 숨이 베갯잇에 부딪혀 얼굴로 되돌아왔다. 머리가 웅웅 울리고 코언저리가 뜨겁다. 일어나고 싶은 동시에 일어나기 싫어서 갈등하다가 결국 번데기처럼 이불을 둘둘 만 채로 구물구물 일어났다.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지 허리를 세우자마자 세찬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아, 왔다, 왔어… 어쩐지 어제부터 낌새가 수상쩍더라니.
 방전되어 있던 핸드폰에 밥을 주고 전원을 켜자 문자 서너 개가 한꺼번에 떴다. 일어났어요? 저는 지금 일 마무리하고 버스 타요. 열한시쯤이면 터미널 도착할 거예요. 미열 때문에 멍멍한 손끝으로 늦은 답장을 보냈다. 조심해서 와. 근데 나 감기 왔나 봐. 올 때 종합감기약 하나만… 거기까지 보내고 또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깊게 잠들지도 못하고 넘실거리는 수면에 이리저리 떠다녔다. 잠결에 문이 열리는 소리, 이마를 짚는 찬 손과 A의 먼 목소리를 들었다.
 많이 아파요? 오면서 죽 사 왔어요. 약이랑 먹고 자요.
 대답만 겨우 하고 한참 정신을 못 차리다가 간신히 상 앞에 앉아 죽을 떴다. 분명 새우랑 당근 같은 게 보이는데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없는 식욕에 억지로 씹을수록 머리가 무거워진다. 오로지 의무감으로 반 그릇을 비운 뒤 약을 먹고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폭 떨어지듯 꾼 꿈에는 내가 걸린 감기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왔다. 놈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몸살과 열도 데려왔다. 그것들과 놀다 보니 한겨울인데 나는 점점 따끈따끈해지고, 줄줄 흘러 바닥으로 퍼져갔다. 킬킬 악독하게 비웃는 것들에게 팔다리를 허우적대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개꿈이야. 식은땀으로 등과 머리가 축축했다. 숨을 들이쉬자 내내 꽉 막혀 있던 콧속으로 시원하게 바람이 들어온다. 뻐근했던 몸이 조금 개운한 듯도 했다. 약이 잘 듣나. 누워서 마른세수를 하다가 또 잠들었다.
 좀 살만해진 저녁. 나는 소파에 반쯤 누워 시집을 보고 A는 옆에서 키위를 잘랐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 사이로 A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키위가 미네랄이랑 비타민이랑 뭐더라, 미네랄이 많대요.
 이미 수십 번 읽은 시집은 책장을 덮어도 눈을 시리게 했고, 조곤조곤 말하는 네 목소리는 어딘가 봄볕 같은 데가 있었다. 하루 동안의 병 앓이로 가슬가슬해진 몸이 금세 녹녹해진다. 어느새 접시에 산처럼 쌓인 키위를 한 조각 찍어 먹자 입 안에서 무르고 신 과육과 까만 씨가 자박자박 씹혔다.

 해가 지나간다. 감기도 과일도 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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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한해

 상우의 고양이는 나를 보면 어김없이 하악질을 했다. 너 인상이 더러워서 그래. 품 안의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녀석이 얄밉게 낄낄 웃어댄다. 바닥에 벌렁 드러눕자 손과 무릎에 달라붙은 주황색 털이 보였다.
 …얘 털 장난 아니다. 뭐 얼마나 만졌다고 묻냐.
 털 공장이라니까. 아침마다 털 떼는 게 일이야.
 상우는 고양이를 내려놓더니 툴툴 털고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손에는 뭔가 묵직한 게 들려 있었다.
 초콜릿 먹을래?
 얼굴 앞으로 짙은 감색 상자를 불쑥 들이민다. 모서리를 두른 덩굴 문양과 화려한 필기체로 찍힌 로고가 전부 금박이었다. 초콜릿 주제에 몸값 꽤 비싸겠다. 상자를 도로 밀면서 이게 웬 건지 물었다. 너 단 거 안 좋아하잖아.
 한해가 줬어. 프랑스에서 사 왔다고.
 아. 한해… 서한해. 한국 들어왔구나.
 온 지가 언젠데. 너한테 연락 안 왔어?
 내내 쫓아다니더니 드디어 질렸나 봐. 신나네. 이제 나도 나의 인생을…
 한해가 네 스토커냐? 초콜렛이나 드세요.
 채 문장을 끝맺지 못한 입에 우악스레 초콜릿이 들어왔다. 금세 녹은 초콜릿 틈새로 체리 칵테일이 새어 나온다. 혓바닥 위로 퍼지는 액체는 무겁고 향이 짙었다. 굳이 입안을 열어 확인해보지 않아도 붉은색일 거라고 확신하게 하는 맛이었다. 잠시 잊고 있던 어제의 일이 선명히 떠올랐다. 고막 위로 튀기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기억의 시작이다. 한쪽 뺨이 붉게 부어오른 한해가 침을 뱉자 붉고 찝찝해 보이는 것들이 진득하게 섞여 나왔다.
 한해야.
 나를 노려보는 시선에 담긴 독기. 조금만 더 자극하면 터질 것 같아 재밌는 동시에 아쉬웠다. 녀석의 분노와 이성 중 결국에는 이성이 이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들끓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참을 수 있다는 게 나는 신기했다. 전생에 스님이 아니었을까.
 …형.
 한 번 더 울어 봐.
 뭐요?
 너 나랑 자고 싶다고 울었었잖아.
 그러자 한해의 얼굴이 아주 혐오스러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일그러졌다.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한 말이 가관이었다. 형 왜 이렇게 변했어요? 먼저 도망가버린 게 누구였는데, 나는 적반하장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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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올렸던 <그때>와 연결됩니다(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