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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듯 가볍게 굴러들어온 말에 '홍'은 고개를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가볍게 커튼을 흔들고, 뒤이어 제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저를 담담하게 쳐다보는 그 시선을 마주하던 홍은 안경을 똑바로 고쳐 쓰고 책 안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눈치 챘을지도 몰랐다.


그 말을 듣고난 뒤부터 이미 책은 읽히지 않기 시작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제 시선은 빼곡한 글씨들한테서 아득하게 멀어지는 중이었다. '원'의 말을 듣고난 뒤에 아무래도 뇌에서 고장이 난 것 같다고 결론 내렸다. 책을 덮고 일어날까 말까, 정신을 좀 차리자는 마음을 먹던 와중, 턱아래로 손이 들어오고 그 잠깐의 채 침묵을 느끼기도 전에, 입술 위로 부드럽고 살포시 누르는 힘이 들이닥쳤다. 

원의 속눈썹이 길다는 것을 홍은 그때 처음 알아챘다. 그것을 알아채고 나서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어디서 왔지?
[["synd.kr", 11], ["unknown", 125], ["www.google.co.k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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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류와 월 : 첫만남(2)

 늙은 남자는 월에게 선물로 검은색 가방을 내민다.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는 적당한 크기의 가방을 월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다. 어째서 검은색인가? 라는 의문도 가지기 전에 늙은 남자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한다.
 " 파트너에게 맞춰야하지 않겠니? "
 그 말에 절로 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류에게 향한다. 류는 그저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며 월을 쳐다본다. 어린애인 월에게 그 질문은 쉽게 납득을 할 수가 있었다. 월은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 검은색 가방을 옆으로 멘다. 아직 고맙다고 하기에는 이르단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벚꽃 모양의 귀걸이를 내민다. 가방과 똑같이 검은색이고, 다른 것이 있다면 귀걸이 중앙에 분홍색 작은 보석이 박혀있다는 점이다. 월은 갸웃을 하더니 늙은 남자를 올려다본다. 늙은 남자는 미소를 인자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 이걸 차고 있으면, 밖에서도 네 힘을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을거다. "
 그 말의 의미를 안다는 듯 월은 그 귀걸이를 빤히 쳐다본다. 허리를 꾸벅하면서 월은 늙은 남자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다시 인사를 한다. 늙은 남자는 그저 웃으며 월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 그리고 이건 여행에 필요한 돈이란다. "
 " 꽤 많네요. "
 " ... 이렇게 줘도 괜찮은거야? "
 " 이 늙은이가 남은건 돈 밖에 더 있을까? "
 늙은 남자가 건네주는 돈 주머니를 월은 받는다. 류가 월의 옆에서 돈의 액수를 확인하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늙은 남자에게 묻는다. 늙은 남자는 오히려 되받아치며 묻고, 류는 그저 입을 꾹 다문다. 자, 그러면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출발해볼까? 라고 하며 늙은 남자가 이야기의 문을 열려고 한다. 그 말에 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늙은 남자 뒤에 있는 문을 가르키며 묻는다.
 " 저 문으로 나가면 되는거야? "
 " 음? 그것도 좋지만, 이렇게 나갈거란다. "
 짝- 하면서 늙은 남자가 박수를 친다. 하? 라고 하면서 류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월은 고개를 갸웃한다. 쎄한 느낌을 받은 류가 시선을 월에게 향한다. 월의 발 밑에 구멍이 생기는 것을 보더니 황급히 손을 뻗으며 월을 부른다.
 " 어이, 꼬맹이! "
 " 잘 다녀오거라 "
 류, 그리고 월. 타악-! 그 짧은 순간에 류는 월의 팔을 잡는다. 그리고 한순간에 슈웅- 하면서 두사람이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전혀 웃긴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늙은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러다가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렇게 말한다.
 " 여전히 감 하나는 좋구나. "
 자, 그러면 어디 한번 지켜볼까?
 슈우우웅-! 한순간에 화면이 전환되면서 보이는 것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자신과 월이었다. 월은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영감탱이를 그냥! 속으로 그렇게 늙은 남자에 대해서 욕을 하던 류는 엄청난 풍압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한손을 뻗더니 월을 자신의 품에 안는다. 갑작스러운 안김에 월은 꼬옥 감고 있던 두 눈을 살며시 뜬다. 자신을 안고 있는 류의 얼굴을 쳐다본다.
 " 그 영감탱이! 다음에 만나면 한 방 먹여줄테다-!! "
 라고 악에 박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부웅- 하면서 두사람의 몸이 떠오른다. 응?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 풍압에 월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까보다 엄청난 속도가 아닌 천천히 지면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류의 두 발이 지면에 안착한다. 월은 두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류를 쳐다본다.
 " 능력? "
 " 그래 "
 류는 월을 지면에 내려준다. 주변을 둘러보니 숲이다. 그 사실에 류는 이마에 사거리 마크를 단다. 하필 보낸다는 것이 숲이라니, 더군다나 늙은 남자가 있는 그 성은 여기서 보이지가 않는다. 아주 비밀이 가득하구먼. 이라고 하면서 류가 중얼거린다. 월은 검은 가방을 열더니 종이 한 장을 발견한다. 고개를 갸웃하고 그것을 꺼내서 펼쳐본다.
 " 류 "
 " 왜? "
 " 이거 지도야 "
 " 하? "
 월의 말에 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월은 류가 볼 수 있게 두 손을 높이들어 그 지도를 보여준다. 그것을 보니 오히려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 류가 난 안봐. 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럼, 내가 보고 알려줄게. 라고 하면서 오히려 태연하게 월은 그렇게 말하더니 지도를 본다.
 " 너, 지도는 볼 줄 알ㄱ... "
 " 여기서 좀만 더 가면 마을이야. "
 " ... 너 애 맞냐? "
 " 설마 류, 지도 볼 줄 몰라? "
 " 야, 장난하냐? "
 " 그럼 그런 질문을 왜 해? "
 " ... 아니다. 됐다. "
 도저히 월의 말빨을(?) 이길 자신이 없는 류였다.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럼, 마을이나 가자. 라고 하면서 류가 먼저 입을 열어 말한다. 응, 이쪽- 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월은 검지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르킨다. 류가 먼저 걸음을 옮기고, 뒤를 따라서 월이 걷는다.
 " 물어볼게 있어 "
 " 뭔데 "
 " 류의 능력은 뭐야? "
 " 이름은 진짜 그렇게 부를 생각이냐? "
 " 그치만 딱히 떠오르는 이름도 없잖아? "
 " ...... "
 틀린 말이 결코 아니기에 류는 반박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미간을 좁히다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입을 열어 월이 물어본 질문에 대답을 한다.
 " 자연을 다룰 수 있지 "
 " 물, 불, 바람... 이런거? "
 " 너도 알다시피 '무기'는 유별나지 않는 이상은 하나의 능력 밖에 타고 나지 않아. "
 " 응, 그건 알아 "
 " 하지만 나는 유별난 놈이라서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여러개를 가지고 있지. 네가 말하는 그 세개를 포함해서도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거지 "
 " 류는 유별난 놈이구나. "
 " 너 진짜... 아니 됐다. 좀 덧붙여서 말하자면, 네가 내 능력을 어찌 쓰느냐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쁘게 말하면 재앙도 될 수가 있지. "
 " ... 그건 명심할게 "
 " 근데 애초에 네가 날 다룰 수는 있냐? "
 잘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류는 몸을 반쯤 돌려서 월에게 물어본다. 다룰 수 있으니깐, 뽑힌게 아닐까? 라고 하면서 월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려 묻는다. 하긴 그 말도 틀린 것이 아니다. '계약자'마다 그 그릇은 다른다. 아무리 자신이 가지고 싶은 무기라고 해도 자신의 그릇이 작으면 결코 들어올릴 수가 없다. 그렇다는 말은 즉...
 ' 이 꼬맹이의 그릇은 얼마나 크다는 거지? '
 13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그것도 하나의 능력이 아닌 어마어마한 개수의 능력을 가진 자신을 들어올렸다. 그것도 망설임이 없이, 한치의 끊김도 없이 말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그 늙은 남자가 이렇게 말했었다. 차고 있는 저 귀걸이를 가지고 있으면, 어느정도 힘이 제어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 그렇다고... '
 설마 자신을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는 건가?
 " 류 "
 " 어엉? "
 " 마을이 보여 "
 저기에, 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마을이 위치해있다. 마을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더니 그제서야 아까보다 얼굴이 펴진다. 그리고 그것을 월은 단번에 알아챈다. 일단은 마을로 가서 정비를 해야겠지. 속으로 그리 생각한 월은 아까 늙은 남자에게 받은 돈 주머니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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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uare

발렌타인

무슨 악마의 장난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다니엘라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러고는 가벼이 악마를 입에 올린 자신을 탓하며 성호를 그엇다. 하늘의 계신 아버지. 저의 죄를 사해주소서.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는 두손을 부지런히 놀려 잠두와 완두콩을 손질했다.
잠두와 완두콩의 깍지를 제거하고, 껍질콩의 꼬투리를 다듬고, 줄기콩대를 바구니에서 꺼내자 그때서야 아궁이에 올려둔 물이 끓어올랐다. 다니엘라는 뜨거운 냄비속으로 잠두를 와르르 쏟아부었다. 콩 알갱이들이 휘청거리며 물속을 유영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니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전 마을로 들어온 여행객 하나가 다니엘라의 평화로운 일상을 망치고 있었다. 적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한 여름날 두툼한 망토를 입고 나타났던 그 남자는 놀라울정도로 마을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렇게 사교적이고 친화력 좋은 남자와 다니엘라는 이상하게도 이 좁은 마을에서 일주일 내내 마주치지 못했다. 그것이 오늘, 남자가 다니엘라의 무거운 물통을 집까지 옮겨주면서 끝났다. 남자는 동행하는 내내 친절하고 사근사근하게 다니엘라를 대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보답을 해주겠다는 다니엘라의 의사에 남자는 흔쾌히 청혼의 말을 내뱉었다.
다니엘라는 이 가벼운 청혼을 거절했고 남자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럼 식사라도 대접해달라며 그녀의 현관겸 응접실에 앉아서 다니엘라가 내어준 백탕을 마시고 있었다.
다니엘라는 물이 넘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나머지 콩들을 냄비에 쏟아부었다. 그녀는 빠릿하게 움직이며 우묵한 나무 그릇에 파와 박하를 잘게 썰어 담고 익은 콩들을 구멍이 뚫린 주걱으로 건져올렸다. 그릇에 삶은 콩을 넣은뒤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를 솔솔 뿌리곤 주걱으로 샐러드를 버무리자 박하의 싸한 향기와 콩의 달큰하고 포근한 향이 한데 뒤섞였다. 미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다니엘라는 미소 지었다. 레몬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테지만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다니엘라는 그릇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의자에 앉아 두손안에 쥔 찻잔을 굴리고 있던 남자가 다니엘라를 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와요. 여기 앉아요.]
다니엘라는 자신의 집에서 어서오라는 인사를 받는게 퍽 낯선 상황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작은탁자에 그릇을 올려두곤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요?]
다니엘라는 남자가 비워둔 의자를 가르키곤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소매자락을 끌어당기자 그가 쉽게 끌려왔다. [여기 앉으라고요?] 남자는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살풋 미소지었다.
[다정하네...역시 결혼할래요?]
다니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왜요?]
다니엘라는 대답 대신 그릇의 한쪽면을 탁탁 치곤 스푼의 손잡이가 남자의 쪽으로 향하게 내려놓았다.
[역시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는거겠죠?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서있을거에요? 그냥 내가 선채로 먹는게 더 나을것같은데, 아니면 내 무릎에 앉는건.] 다니엘라는 바느질감을 넣어두는 상자를 가져와서 그위에 앉았다. [싫다 이거죠? 알았어요. 하지만 정말 첫눈에 반했다고요. 포기하지 않을거에요.]
남자는 다니엘라가 곤란해할 말만 골라하며 콩 박하 샐러드를 한입 먹었다. 그리고는 또 한입.
[우와!! 여기 뭐가 들어간거에요? 아주, 냠. 아주 맛있는데요?] 남자의 뒤엣말은 입안에 들어찬 음식물탓에 웅얼거리며 끝났다. 다니엘라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려깔자. 남자는 더 열정적으로 샐러드를 우물거렸다.
[응식점울 해도 대갰응요]
다니엘라는 풋 웃고는 남자에게 다시 물을 따라줬다. 샐러드 그릇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 엄청나게 빠른 식사 속도에 다니엘라는 오늘따라 놀랄일이 많은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정말 너무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다니엘라는 겸양하는 동작을 하곤 자신도 고맙다며 물통과 남자를 번갈아가며 손짓하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일으켰다. 남자는 베시시 웃었다.
[그런 의미로 다음엔 제가 대접하도록 할까요? 혹시 파스티 좋아해요? 제가 아주 기가막히게 만들거든요.]
다니엘라는 파스티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남자는 그것을 알아차리곤 더 자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지, 단순히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앉아있는 의자를 끌고 다니엘라의 곁에 바싹 붙어앉았다.
[페이스트리 반죽에 만두처럼 버섯이랑 감자속을 넣어 만드는건데 아주 맛있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는게 어때요? 전 이 마을이 아주 마음에 들고 한동안 여기서 살 집도 구해놨거든요. 내일 집들이 기념으로 파스티를 대접할게요.] 참고로 당신 집에서처럼 아무짓도 안할게요. 남자는 덧붙이며 자신의 레이디에게 기사들이 맹세하듯 경례했다. 다니엘라가 깜짝 놀랄정도로 절도있는 동작이였다.
[대도시에서 제가 파스티 장사를 했었거든요. 그러니, 기대해도 좋아요?]
다니엘라는 어느새 '다음' 약속이 생긴것을 기뻐해야할지 곤란해야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남자는 속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불현듯 몸을 경직시켰다. 다니엘라는 갑자기 긴장하는 남자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다니엘라가 남자의 초조한 얼굴을 바라보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마저 말했다. [다니엘라.] 다니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결혼할래요?]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곤 그릇을 설겆이 하기 위해 챙겼다. 그러는 그녀의 손목을 남자가 황급히 잡고는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번건 취소! 이번건 카운터에 더하지 말아줘요!!] 무슨 카운터? 다니엘라는 눈을 꿈벅거렸다.
[물론 다니엘라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요. 우선 묻고싶은게 있어요.] 다니엘라는 남자의 눈을 다시 바라봤다. 초콜릿처럼 짙은 고동색 눈이였다.
[내 이름이 뭔지 알아요?]
다니엘라는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러고보니 여태 남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남자가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네요.]
남자는 다니엘라의 손을 가져가서 손바닥 위에 천천히 스펠링을 적었다. 다니엘라는 소리내어 그것을 읽지 못했지만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글자체로 그의 이름을 만들었다. 먹빛의 바탕위로 하얀 붓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완만하게 올라오고 우아하게 끝났다.
발렌타인.
[네, 다니엘라.]
남자의 대답에 다니엘라는 깜짝 놀라며 어깨를 움찔떨었다. 들었을리 없었지만 남자는, 발렌타인은 그녀에게 대답했다. 발렌타인이 다니엘라의 눈을 마주 바라봤다. 다니엘라는 단순히 그가 그녀의 눈빛을 읽은것이고, 타이밍을 잘 맞춘것뿐이라는걸 알았지만 왠지 그 눈빛을 피할수가 없었다.
[다시 불러줘요.]
다니엘라는 주저했다. 발렌타인은 알수없는 미소를 지은채 그녀를 기다렸다.
또 다시 마음속에서 떨리듯 글자가 움직였다.
발렌타인.
이번 대답은 좀 늦었다. 발렌타인이 좋아 죽겠다는듯 웃고있었기 때문이다.
[네, 다니엘라.]
다니엘라는 손을 빼내려했다. 발렌타인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다니엘라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발렌타인.
[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 대답할게요.]
놓아달라는 말이였는데. 다니엘라가 발렌타인을 빤히 응시하자 그는 그 시선을 뻔뻔하게 무시했다. 다니엘라는 발렌타인이 대접하는 파스티 식사를 꼭 받겠다고 확답을 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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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첫 만남은 내가 먼저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시작된다. 대화를 가장한 폭력에 반듯이 세운 등허리가 굳는다. 질문이 내 앞에 떨어진다. 답은 이미 내려져있고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것을 그대로 읊는다.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 후에야, 내겐 그 자리를 벗어나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그제야 새로운 세상과의 첫 만남이 끝난다.
 나를 처음 마주한 눈빛부터 내게 건네는 말 한 마디, 질문 하나, 마지막의 수고했다는 속 빈 인사말까지. 내겐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한 암묵적인 명령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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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류와 월 : 첫만남(1)

 째깍, 째깍- 하면서 시계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서 울려퍼진다. 늙은 남자가 커다란 쇼파에 앉아서 조용히 독서를 즐기고 있다.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은 늙은 남자가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어여쁜 붉은 장미가 그려진 찻잔이 올려져있다. 늙은 남자가 있는 방은 책으로 가득 도배가 되어있으며, 무언가 웅장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마치 그 늙은 남자에게 쉽게 접근하지 말라는 것처럼 말이다.
 끼익- 하면서 고급스럽지만 어딘가 낡은 소리를 내는 문이 열린다. 터벅터벅 하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작은 분홍색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늙은 남자는 읽고 있던 책을 덮더니, 옆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자신이 앉고 있었던 큰 쇼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런 늙은 남자의 행동을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지켜보는 한 소녀가 있었다. 분홍색 양갈래 머리에 분홍색 눈동자, 나이는 대략적으로 열 세살인 것 같다. 그치만 그 나이에 맞지 않게 소녀는 과묵하고, 무표정을 가지고 있다.
 " 슬슬, 시간이 되었나보구나 "
 " 할아버지, 그 사이에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
 " 설마, 그럴리가? "
 오늘은 너에게 있어서 중요한 날이잖니? 라고 하면서 늙은 남자는 미소를 짓는다. 그 말에 더이상 소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터벅터벅 하며 이번에는 늙은 남자가 소녀를 향해서 걷더니, 소녀를 지나쳐 방 밖으로 나온다. 소녀는 늙은 남자가 미처 닫지 못한 그 방 문을 닫더니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집 안 곳곳에 깔려있는 것은 붉은 카펫이었다. 늙은 남자의 뒤를 지키는 것처럼 소녀는 뒤에서 따라 걷는다. 낡은 집인 듯 하지만 웅장함을 가지고 있는 이 집은 마치 늙은 남자 그 자체를 설명하는 것 같다. 늙었지만, 여전히 귀품을 가지고 있고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커다란 갈색 문이 두사람을 반겨준다. 늙은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문고리를 잡아서 돌려 그 문을 연다. 빛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반기는 것은 어둠이었다. 그렇게 어두운 것은 아니었지만, 소녀는 그것을 어둡다고 느낀다.
 " 자, 너는 어떤 '운명'을 고를 것이냐? "
 마치 그것이 흥미로운 일이라는 것처럼 늙은 남자는 미소를 짓더니 소녀에게 묻는다. 소녀는 그런 늙은 남자를 쳐다보다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민다. 내딛 한 발자국으로 인해 망설임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망설임은 없었던 것인지 소녀는 앞으로 나아가서 어둡다고 느낀 그 방 안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소녀가 앞서 걸어갔고, 소녀의 뒤를 늙은 남자가 뒤따른다. 스윽- 하며 작은 두 손을 앞으로 내민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소녀가 잡아서 들어올린 것은 자신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검은 낫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표정에는 힘든 기색은 없다. 늙은 남자는 소녀의 선택에 살짝, 아주 살짝 미묘한 표정을 보이다가 웃어버린다. 그래, 너는 그 '운명'을 선택했구나.
 " 그러면 이제 서로 인사를 해야겠지? 이제부터 서로 '계약관계'이자, '파트너'이니깐 "
 늙은 남자의 말에 소녀는 검은 낫을 잡고 있던 자신의 두 손을 놓는다. 휘리릭-! 하면서 검은 낫이 허공에 세바퀴 정도 돌더니 그 모습이 낫에서 한 남자로 바뀐다. 훨친한 키에 하얀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조끼를 입은 그 복장은 어째서인지 바텐더 혹은 집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으며, 검은태 안경과 뒷머리가 살짝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그는 검은색이었다. 훨친한 키에 소녀는 고개를 최대한 위로 들어올려 그를 유심히 쳐다본다.
 " 엉? "
 마침내 그와 소녀가 서로 마주본다. 그와 소녀는 서로를 무표정으로 쳐다본다. 먼저 표정이 변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녀가 아니라 그 쪽이었다.
 " 날 들어올린게 꼬맹이 너냐? "
 " 응 "

 " ... 거기다가 여자애? "

 장난해?! 라고 하면서 버럭 화를 낸다. 다양한(?) 리액션을 보이는 그와 다르게 소녀는 그저 무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인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그의 시선이 뒤에서 이 상황을 여유롭게 구경하는 늙은 남자에게 향한다. 늙은 남자는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순간 저 늙은이의 면상을 한대 쥐어박고 싶다고 생각한 그이지만, 그것을 억누른다. 어쨌뜬 자신을 들어올렸다는 것은 그만한 충분히 자격이 있다는 증거니깐.
 " 이름 "
 " 허? "
 " 이름, 알려줘 "
 " 이름을 알고 싶으면, 먼저 이름을 말하는게 예의다. 꼬맹아 "
 소녀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말한다.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그 말에 두어번 눈을 깜빡이던 소녀는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한다.
 " 류월 "
 " 류월? 한자냐? "
 " 응, 흐를 류에 달 월 "
 " ... 너와 어울리지 않는데? "
 소녀의 이름에 그는 고개를 까딱하며 말한다. 아직 소녀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류월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그 이름과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라고 하면서 류월은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자꾸만 말려드는 류월의 페이스에 다시 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는 오른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다. 어째서 이런 꽉 막힌 여자애가 자신을 들어올렸다는 말인가?
 " 이제 그쪽 이름 "
 " 없어 "
 " ... 없어? "
 " 그래, 없다. 왜? "
 마치 꼽냐라는 식으로 말하는 그의 말투에 류월의 무표정에 변화가 나타난다.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으로 턱을 어루만진다. 애인데 하는 행동은 뭔가 어른 뺨치는 바람에 그는 그것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늙은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고, 지금의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여전히 웃고 있다.
 " 그럼 이름을 줄게 "
 " 뭐? "
 " 네가 류, 내가 월. "
 그래서 둘이서 류월이야. 라고 하며 말하는 소녀의 표정은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어이가 없는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며 소녀를 쳐다본다. 하아?! 라고 하면서 늦은(?) 리액션을 보여주더니, 늙은 남자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이렇게 말한다.
 " 대체 이 꼬맹이 뭔데?! "
 " 음, 류월... 아니 이제는 월이구나. 월이 좀 특이하기는 하지 "
 " 이건 특이한 것을 넘었다고?! "
 애가 애 같아야 애 아니야?! 라고 하면서 오히려 그가 언성을 높여 말한다. 늙은 남자는 그저 허허 하면서 웃을 뿐이었다. 저 늙은이도 한통속이야. 라고 하면서 속으로 그리 생각한 그는 낮게 으르렁거린다. 스윽- 하면서 그런 그에게 작은 손이 내밀어진다.
 " ...... "
 " 잘 부탁해, 류 "
 여전히 무표정으로 월은 그렇게 말한다. 류라는 이름을 받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쉰다. 어차피 이제와서 무를 수는 없다. 아니, 만약 무를 수 있다고 해도 저 뒤에서 지켜보는 늙은이가 그걸 허락할리가 없다. 어차피 어린애다. 조만간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분명 스스로 그 입에서 계약파기라는 말을 꺼낼테니깐. 지금은, 이 순간만큼은 이 손을 잡아주자.
 스윽- 하며 류는 오른손을 내밀더니, 작은 월의 손을 잡아준다. 그것을 보고 늙은 남자는 박수를 쳐준다. 경사스러운 날이구나, 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어째서인지 늙은 남자의 말이 심히 거슬리는 류였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류의 손을 보고...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 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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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식욕

늘 맛있게 내려주는 커피만큼 괜찮을 줄 알았던 녹차는 기대보다 텁텁했다. 여기는 앞으로 커피만 시켜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던 책을 펼쳤다.
소설은 아직 초반부였으나 주인공은 벌써 사람을 세 명이나 죽였다. 발 앞의 난도질 당한 시신. 기분 나쁜 온기가 남아있는 핏물. 뱃속 깊숙이 박혀 잘 빠지지 않는 칼을 부득부득 빼내는 묘사에 식욕이 완전히 달아났다.
“사람 죽인 적 있어요? ”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한 여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아는 여자다. 맨 윗층에 사는, 집주인의 딸.
“있으면 여기서 커피는 못 마시겠지.”
최대한 억양을 덜어내고 대답했다. 목소리에 자칫 온기나 냉기가 묻어나지 않도록. 목덜미처럼 드러난 감정만큼 손쉬운 먹잇감은 없기 때문이다.
여자의 시선이 나에게서 내가 들고 있는 책 표지로 옮겨갔다. 핥는 듯한 시선에서 나른한 전의를 느꼈다.
“매일 이런 것만 읽길래, 연구라도 하는 줄 알았죠. 제목에 들어가는 단어부터 그렇잖아. 사건, 살인, 시체, 죽음.”
여자가 책 제목으로 나를 찌르는 동안 나는 그녀의 흰 살결을 본다. 푸른색 셔츠 깃 위로 뻗은 가느다란 목. 두 손으로 잡고 누르면 툭 부러지지 않을까.
누군가 토스트를 주문했는지 카페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문득 고개를 든 식욕이 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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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당신은 만날때마다 검정이네요."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늘어진 머리칼과 검정색 셔츠, 검정색 가디건과 검정색 면바지의 남자는 한쪽손에 벗어든 검정색 신발을 쥐고 있었다.
남자의 하얀 발 아래로 파도가 넘실거리는것이 보였다.
"안 추워요?"
허리까지 물에 잠긴 내가 할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나는 얼음장같은 바닷물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다. 나는 깊게 숨쉬려 노력했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냉기에 제대로 움직일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 모든일에 자신은 관계없다는듯이, 너무나 태연하게.
"안 추,워요?"
떨리는 턱에 힘을 주며 다시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내 입가가 희미하게 미소짓는것이 느껴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자가 대답해주는건.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변덕을 부리고 있는 것 일까.
"추운데, 왜 여기있어요?"
울고있던 내 얼굴로 남자가 시선을 던졌다.
"나 때문에요?"
남자는 침묵했다.
"날 보러온거에요?"
재차묻자 긍정하듯 남자가 얕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요? 내가 어떻게 뒈지나 보고, 보고싶어서, 왔어요?"
나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두팔로 내 몸을 힘껏 껴안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추워서 참을수가 없었다. 두 손과 두 팔이 가슴속으로 더 깊게 파고들도록 나는 품에 나를 묻었다.
"네깟게 어디까지 버티나, 얼마나 괴로워 해야. 고통받아야, 제손으로 목숨을 끊을까, 궁리하다가. 이제, 죽을테니까. 어떻게 죽나, 궁금해서 찼아왔어요? 부모도 죽고, 형제도 죽고, 친척도 죽고, 친구도 죽고,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자살하나,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찼아온거에요?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요?"
나는 정신나간 여자처럼 중얼거리며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요, 궁금했어요. 왜 내곁에 누군가 죽을때마다 당신이 나타나는지 궁금했어요. 당신은 저승사자에요? 천사같은거에요?"
남자의 하얀발은 미동도없이 그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고해성사 하듯 고개를 숙이고 그 발을 바라봤다.
"이런게, 저승사자면 천사면.
지옥에 떨어져도 필요없어요, 나는."
부모님이 눈앞에서 돌아가시던 8살때부터 내앞에 나타난 남자는 한번도 내 물음에 입을 열어 대답한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묻고야 말았다.
"왜, 나한테 죽어버리라고 말 안해요? 왜 계속 날 구해줘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거기 있는건 서리 내린 들판처럼 차고 시린 눈이었다.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남자는 짙은 눈으로 날 내려다 봤다.
"그래야."
대답없던 자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나는 숨쉬는것마저 잊고 홀린듯 그 입술을 바라봤다.
몸을 굽힌 남자가 바다속에서 내몸을 끌어올렸다. 출렁이는 파도가 떠나지 말라며 내 젖은 옷깃을 끌어당겼다.
차가운 귓가로 남자가 속삭였다. 나는 겁에 질려서, 안도감에, 예상했던 대답에.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야말았다.
남자가 말했다.
"그래야. 고통이 계속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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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어둠
그 사람 어둠 몰고왔다 
어둠 몰고 사라진다
그 사람 오던 날, 내가 그 사람에게 가던 날
어둠이 쏟아졌지 아니, 솔직히 어둠이 
빼꼼히 고개를 살짝 내밀었을 때지
막 퇴근하고 6~7시 경에 달렸으니까
마침내 딱 만났을때 
두서없이 두말없이 서로의 채취에 빠졌고
어둠은 벌써 하늘을 덮은지 오래...
그것이 문제였던가 무엇이 문제였던가
어제 그 사람 어둠몰고 사라졌다
만남 뒤에 우린 서로의 채취에 빠졌고 향기에 빠졌고
냄새에까지 풍덩했지 너무 깊게 빠진듯 하지만
이런 각오없이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나 그것마저 어둠이었나
그 사람은 이미 저 만치 어둠몰고 가버렸다
여명이 트는 새벽녘 난 왜 취했있는가 
그 사람 생각에 취해있나 그 사람 모습이
눈 앞에서 환하게 비춰졌다 
어둡게 사라졌다해서인가 
아니면 술냄새로 내게 남은 그 사람 냄새
제거하기 위함인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다만 검은것만이 어둠이 아니고 
흰것만이 빛이 아님을 느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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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노동요
1~2년 묵은 듯한 비트의 E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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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걸이의 소망

백조같이 꿋꿋한 고개를 들고 무리지은 옷걸이야
물에 닿고 싶어 매일 세탁되는 옷을 부럽다는듯 쳐다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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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르고 싶다

내가 이상한거 같아
쉬고싶은데 생각이 나 자꾸 떠올라
내가 이상해지는것 같아
왜이러는걸까
고개를 한껏 저어보지만 그래도 역시
이상하게 니가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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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진심이야?
부엌에서 내려와 방으로 가던길에 살짝 열린 원장실 문 틈 사이로 원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단 말이다. 그 아이가 이곳을 떠나 간단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그 길로 당장 아이에게 달려가 떨리는 눈을 하고서 물었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아이는 목적지도 알려주기 싫은 듯 짙은 선홍빛의 입술을 굳게 다물고서 목소리 조차 들려주질 않는다. 
너, ..너 정말로 가는거야? 
아니 왜?

갑자기 왜? 
서서히 지고있는 노을을 바라보는 아이의 옆에 주저 앉아 옷깃을 붙잡고 울분이 가득 담긴 물음을 쏟아내었다. 
어딜봐서 갑자기야.
이게 갑자기가 아니라고..?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따분한 눈으로는 노을을 바라보며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것 처럼. 그에 무너지는 건 또 나였다. 눈꼬리 끝에 매달려 곧 펑펑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옷을 적셨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더욱 차갑게 굳은 아이의 표정을 본 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런다고 아이의 표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였다. 내가,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그 지겹다는 표정 좀 지워줘 제발. 아이는 자신의 옷깃을 너무 세게 쥐어 하얘진 내손을 억지로 뿌리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에도 움찔 한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이내 나가버리는 아이는 예전의 내 아이가 이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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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 전에 말을한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반복하기 시작했다 
내 손은 비눗방울을 불었고 
둥둥 채 뜨기 전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피아노소리가 들리면 머리가 기울렸고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멍하니 고개를 까딱였다
의미없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쳤고
얼굴을 엎었다 머리가 뒤엉켜 목이 간지러웠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입안에 머리카락 몇가닥이 들어와 있지만 그것마저 신경쓰지 않았다
우주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 속에 침식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무거워지고
몸이 무거워지고
그 자리에서 잠에 들었다
노래를 부르는건 좋아하지 않았다 
들어주는 것이 작은 개미일지라도 기뻤지만
감정과 얼굴을 보며 노래를 부르는건 용서치 못했다
나는 조그만 인간이고 또 그들과 같지않다
그렇게 나는 단정짓고 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라며
주변은 가라앉는 우주 뿐이었다
스쳐지나가는 기차 밖 풍경이었고
그것의 속도는 ktx만큼 빨랐다
나의 몸짓하나로 생기는 모든 일들을
나의 몸체에 모두 쏟아넣은 책임들을
내가 감당하기엔 힘든 것들이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나를 가두었다
나는 내가 변한 것을 안다
나는 자주적이며 쾌활한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현실은 달랐고 그것만큼은 아주 달랐다
가죽 안에 쌓여가는 기름에 고통받는 오늘도
이렇게나 무기력하게
사람들은 자기 전에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