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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k <Andrea Reiman / Unsplash>

폭풍전야


[퉁퉁퉁퉁.]


다리 난간에 걸린 현수막이 세찬 강바람에 고장난 현악기처럼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렸다.
너무 오랜시간 비바람에 노출되어 넝마나 다름없는 그것은, 폭풍전야의 바람을 먹고 가장자리가 팽팽하게 당겨져 휘리릭 말려올라갔다 다시 펼쳐지는것을 반복했다.


어제 저녁부터 지금 막 동이 터 올 때까지. 남자는 고가도로가 보이는 건물 옥상에 앉아 밤새도록 경계를 서고 있었다.

차가운 희광이 파괴된 도로와 무덤처럼 변해버린 건물들을 비추자 황폐한 도시의 풍경이 한층 더 으스스하게 보였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그는 고개를 돌려 원래는 현수막이었을 천조각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 위에 희미하게 남은 그림과 글자를 보고 그것이 시위용 현수막이라는걸 깨달았다. 물 빠진 붉은 바탕에는 주사기, 동물 따위의 그림이 남아있었다.


식사시간이 되자 남자는 포장이 벗겨진 낡은 캔 하나를 들어서 어제 먹다남은 것들을 처리 하기 시작했다. 급하지 않게 최대한 천천히, 그러나 맛을 음미하지 않으려 애쓰며 기름이 번들거리는 고기조각을 입안에 넣는다.

그렇게 짧은 아침식사가 끝나고 남자는 개먹이 통조림을 난간 아래 내려놓았다.

텁텁한 입안에서 악취가 났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속 전구에 전기가 팟 하고 들어간것처럼, 남자는 회사 자판기에서 뽑아 마셨던 달달한 믹스커피를 떠올렸다. 배운지 얼마 안되서 곧잘 기침을 터트리게 만들던 담배에 대한 기억도 함께.

자판기 커피를 떠올리고 나니 겉잡을 수 없이 향수병이 도졌다. '장소'가 아니라 '때'를 향한 향수병이었다.

그는 옛날이 그리웠다.


편리하고 배부르며 청결했던 생활이 그리웠다.


에어컨 바람과 편의점이 그리웠다. 그가 타고 다녔던 구식 토요타가 그리웠다. 자극적인 음식들이 먹고 싶었고, 집 앞 산책로를 걷고 싶었다. 주말 마다 가던 북한산도 가고 싶었다. 지겨웠던 회식자리도 그리웠다.


그리고 칫솔.


남자는 콧등을 찡그렸다. 숨을 내쉴때마다 어쩔 수 없이 맡게되는 입냄새에 남자는 잠시 갈등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할텐데, 그는 아직 문명인의 옷을 다 벗지 못했다. 결국 남자는 고이고이 모셔뒀던 식수를 입에 한모금 머금었다.

날은 아직 차고, 해가 빨리 지는 요즘이었지만. 남자는 은혜로운 비가 언제나 찾아오려나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 이었다.


사람이 생존하는데 있어서 물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다.

도시에 남아있는 물은 대부분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였고, 패트병에 들어가 있는 깨끗한 물은 거래품 중에서도 특히 비싼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남자는 생수병을 사자고 물물교환을 할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공짜 식수를 얻기위해 남자가 했던 행동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 이었다. 그는 비가 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멍청한 짓거리 덕분에 남자는 거의 말라 죽을 뻔 했었다.
결국 일주일전에 왔던 폭우가 그를 살렸다. (…차라리 죽는게 나았을텐데.)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생존자들 또한 살렸을 것이다.


물과 식량.


몇년전만 해도 집앞 편의점에만 나가도 쉽게 얻을 수 있던 것 들이다. 너무 흔해서 그 귀중함을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감히 입에도 댈수 없는 사치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오늘날. 갈급한 허기와 혀를 말라붙게 만드는 공포가 편의점 커피보다 쉽게 남자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스며들고 저며들고 끝내는 그를 잠식하리라.


그 추악한 끝을 보기전에 남자는 빨리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이 모든게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국영방송에서는 일본 뇌염모기의 변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떠들어댔으며, 학계의 유명인사는 과학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아마존 밀림에서 새로이 발견된 식인종 향토병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는 국가가 운영하는 비밀실험실에서 실수로 반출된 생화학 무기일거라고 추정했으며 심지어 누군가는 월석에 묻어있던 '외계물질'이 지구생물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작용한것이라 주장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론은 더 말할것도 없으리라.


내일 당장 세상이 끝장 나기라도 할것처럼 온 세상천지에 뜬소문과 개소리가 범람하고 있었다.
SNS에 난무하는 저질스러운 가십과 우스갯소리가 저녁 뉴스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렇게 인류가 꾸물럭 거리는 사이 감염자들의 1차 발작기간이 지나갔다.

1차 발작이 지난 감염자들은 초기에 비해 폭력성이 강했지만 아직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남아있었다.

만약 그때 백신을 연구했더라면 감염이 이렇게나 빨리 퍼지진 않았을 것이다.


정치놀음에 빠진 과학자들과 연구소들이 백신으로 얻을 이익을 주판에 튕기며 계산하는 사이, 나라에서는 재난컨트롤타워를 운영한다며 감염자들을 검사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냈다. 각 가정으로, 회사로, 학교로.
만약 그들을 임시 보호소에 한꺼번에 밀어넣고 격리했었더라면 상황이 좀 나아졌을까?

지금으로선 모를일이다.


2차, 3차 발작은 더 빨리 찾아왔다.


감염자중 한명이 크리스마스 이브날 명동거리에서 생방송 중이던 뉴스앵커의 얼굴을 물어뜯었을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늦은상태였다.


그러니 '만약' 이란말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남자는 달력을 한장 넘겼다. 12월이 지났다. 오늘은 1월 1일. 그의 나이는 이제 30이 지났다.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는 거짓말이 익숙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생각할 수록 막막해지는 것은 살아가는것이 아니라, 오늘 먹을 식량을 구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내일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거야. 아니, 모례는 가능할꺼야. 아니, 어쩌면 일주일 후에.

남자는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술을 잡아뜯었다.


하늘 저편에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고, 옥상에 홀로 남은 남자가 천천히 굶어 죽어가는 가을의 어느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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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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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루

부끄러울 일을 만들고 수시로 발작하듯 떠올린다.
어리석은 순환과 반복 그것이 나의 하루다.
이런 나와 함께한 당신의 하루는 어땠는지
창피했는지, 답답했는지, 화가났는지, 하다못해 재미라도 있었는지
나는 궁금하다.
매일 밤 발작이 멎을 때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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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일기下

 가족 중 누구도 병원 신세를 길게 져 본 적은 없었다. 그 최초가 H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동안 H를 거의 포기하고 내버려 두었던 부모님은 자신들의 방치에 어떤 책임을 느낀 것 같았다. 이 지경까지 온 게 자신들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자책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집에서 늘 하던 부업을 미룬 채 오로지 간호에 매달렸다. 아빠도 되는 데까지 휴가를 쓰고 되도록 병원에 붙어 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난 뒤 H를 보러 갔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일상을 반복하는 며칠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기류는 조금씩 달라졌다. 늘 나에게 치우쳐져 있던 관심이 균형을 맞추듯 H에게로 흘러갔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곧 불균형이 될 거라는 걸 멍청하게도 그때는 몰랐다.
 “H. 안 심심해?”
 “…….” 
 “야, 대답 좀 해 봐.”
 아픈 H는 생소했다. 말 걸어도 대꾸 하나 없고, 밥 먹고 볼일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뇌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랬는데… 약간의 의구심과 불안감은 가볍게 증발했다. 아프니까 그렇겠지. 다 낫기만 하면 평소처럼 돌아오겠지. 간이침대에 엎드려 문제집을 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며칠째 백지만 넘기고 있는 관찰 일기에도 쓸 거리가 생길 거라고.

 H가 퇴원한 주말, 집에서도 내내 자던 녀석은 갑자기 한밤중에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책을 읽다가 놀라서 급하게 H를 붙잡았다.

 “너 어디 가.” 
 “산책.” 
 “이 시간에?” 
 “답답해서… 계속 병원에만 있었잖아.”
 부모님이 있는 침실을 흘끔 내다봤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이거 말려봤자 안 듣겠지. 하는 수 없이 얇은 재킷을 걸치고 나도 따라나섰다. 사람들이 잠들었을 시간. 까만 밤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H는 번화가 정 반대편, 산이 깊고 길이 외진 쪽을 향해 걸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하염없이 나아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헛헛해 보였다. 쟤가 저렇게 가벼워 보인 적이 있었나.

 H, 어디까지 갈 거야. 내내 돌아보지 않던 녀석은 내 물음에 걸음을 멈췄다. 전철이 지나다니는 굴다리 안이었다. 근처의 개천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비린내와 함께 개구리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로 짐작하기에는 수백 마리 같은 울음이 바글거렸다. 

 “……형.”

 평생에 걸쳐 H가 형이라고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H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조용해.”
 “뭐?”
 H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전철이 세찬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갔다. 거대한 소음이 계속해서 말하는 H의 목소리를 덮고 귓속을 가득 채워 몸을 뒤흔들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전철이 사라지고 한참 뒤에야 겨우 말 끝자락을 붙잡을 수 있었다.
 “…벌레 떼처럼 들끓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문득 선뜩한 공포감이 신물처럼 차올랐다. 마주친 H의 눈이 너무도 낯선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조용해서…”
 “…….”
 “귀가 멀어버린 것 같아.”
 H는 바스라기 같은 웃음을 피웠다. 언제나 드세게 타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처럼.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날 밤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H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교복을 단정히 갖춰 입고 제시간에 학교를 왔다. 성실하게 수업을 듣고 책에 필기라는 걸 했다. 부모님, 선생님, 반 아이들, 너나없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그리고 좋아했다. 이제 좀 살겠구나. H에 관한 일이라면 늘 비이성적으로 변했던 모든 곳에 평화가 감돌았다. 그러나 그 평화는 내게 곧 불행이었다.

 “너 머리 병원에서 다시 검사받아보자.”
 “나 멀쩡해.” 
 “아니야, 뭔가 이상이 있어. 미친 것 같다고.”
 “…미친 건 형 아니야? 헛소리 그만해.”
 저벅저벅 자리로 돌아가 얌전히 책을 펼치는 H를 보며 머리를 잡아 뜯었다. 저게 뭐야. 겉가죽 외에는 비슷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저게 어떻게 H야. 내가 부정하거나 말거나 현실은 점점 확고하게 못 박혀 갔다. 갱생한 H, 정신 차린 H. 모두 기뻐하는데 나만 화가 났다. 하루아침에 무미건조해진 생활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손을 놓고 수업을 듣다 보면 학교에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고는 했다.

 혼란스러운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악몽을 꿨다. 놈의 안에 있다고 믿었던 악마가 내게로 찾아온 것 같았다. 온갖 짐승에게 물어뜯기고, 절벽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삼지창에 쉴 새 없이 몸이 찔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겨우 잠에서 깨면 불면의 시작이었다. 새파란 새벽을 타는듯한 머리로 새까맣게 지새웠다.

 잠을 못 자는 날이 늘어갈수록 성격도 뾰족해졌다. 날카롭게 갈린 신경이 스스로를 찌를 때마다 울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몸은 점점 말라가고, 성적은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사사건건 예민하게 굴자 친구들도 떨어져 나갔다. 안에서 자라난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는 내가 울컥할 때마다 끓어오르기도 했다. H가 말하던 끓는 상태라는 게 이런 걸까.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듯한 막막함이 명치께 가득 쌓여갔다.

 “…너 때문이야.”

 무작정 방에 들어와 돌을 던졌다. H는 나를 흘끔 쳐다봤다가 이내 풀던 문제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가 나 때문인데. 사각사각 종이 위를 스치는 연필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너 때문에 여기가 지옥이 됐어. 잠깐의 정적 사이로 바깥의 소음이 끼어들었다.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 엄마와 아빠의 듣기 싫은 웃음소리. 나를 깡그리 무시한 채 홀로 평온한 녀석을 보면서 부아가 치밀었다. H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잘됐네.” 
 “…….” 
 “축하해.”

 빈틈없이 꾹꾹 눌러온 화가 결국 터졌다. 구석에 박혀 있던 야구 배트를 집어 들었다. 맞아서 이렇게 됐으니, 한 번 더 맞으면 예전으로 돌아갈 거야. 근거 없는 확신이 악의와 뒤섞여 근육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팔을 휘두르자마자 터진 H의 짧은 비명과 함께 놀란 부모님이 달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벼락같은 호통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엄마가 H를 감싸 안고, 아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후려쳤다. 힘이 풀려 놓친 배트가 떨어지며 발등을 찍었다. 쓰러지듯 주저앉아 올려다본 H의 눈가에는 뜻밖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엄마 형이, 형이… 난 가만히 있었는데…….”

 엄마는 끔찍하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점점 거세지는 도리질 끝에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대체 왜 그래, 왜! 지긋지긋해, 이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이번엔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픈 발등도 잊을 만큼 황황해 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웃음이 터졌다. 그들이 나를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았지만 웃음은 발작처럼 그치지 않았다. 조악한 연극 세트를 보는 것 같았다.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H도, 경멸 섞인 눈동자가 H가 아닌 내게 향해 있는 이 상황도. 견고하게 쌓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발밑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엄마랑 아빠는 쟤가 안 이상해?” 
 “…….”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아빠가 뭐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곧장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 자식이, 이거 당장 열지 못해? 쫓아온 아빠가 문을 덜컥거리며 소리쳤다. 엄마가 창고에서 방문 열쇠를 찾아오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도망쳐야 했다. 책가방 안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 버리고, 책장 깊숙한 곳에 숨겨뒀던 관찰 일기를 쓸어 담은 뒤 책상 위 아빠의 라이터와 지갑을 훔쳐 창문으로 달아났다.

 한참 뛰어서 온 곳이 겨우 학교였다. 이제 다 자랐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어디 멀리 가본 적도 없는 어리숙한 중학생에 불과했다. 아무도 없는 학교 가장자리를 뱅뱅 돌다가 운동장 구석에 앉아 일기를 꺼냈다. 어설프게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고 또 끅끅 웃었다. 인생 최초의 절망이라는 게 H의 갱생이라니. 우스웠으나 이번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H는 구제 불능이었다. 제멋대로 사고를 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빽빽 소리를 질렀다.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결국 차례차례 H를 포기했다. 나는 그 옆에 있기만 하면 됐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든 칭찬은 내게 돌아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뺨을 적시고 입 안을 붓게 만들 만큼 울었는데도 계속해서 솟아났다. 무너진 발밑으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움켜쥔 바닥의 모래는 새까만 하늘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낮 동안 받았던 햇빛이 사라지자마자 식는 온기는 얼마나 매정한가. 비겁하고 평탄했던 인생이 꼬였음을 자각했다. 짓밟을 디딤돌이 사라진 나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