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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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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비 오는 정류장

비오는 날에 정류장에 있어본 적은 없다.
비오는 날에 버스를 탈 일이 없었기에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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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보는

"그렇게 노려보지마."
너는 노려보지말라면서 나를 싯뿡하게 째려본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단 말이야, 너 걔 표정 봤지?"
"..." 나는 너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야!"
" 아!! 뭔 짓이야!?"
너는 내 어깨를 팍 밀쳤다. 네가 날 밀쳐서 몸이 나도 모르게 뒤로 넘어가버리자 놀라 꽥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넌 내 목소리에 놀라서 귀를 막았다.
그래도 그 싯뿡한 표정은 풀지 않았다.
저녁노을이 다 지나가고 열기조차도 남지않은 여름의 밤에 우리가 서있는 이 콘크리트 건물은 흔들리기시작했다. 옆에 나 있는 도로의 가로등말고는 푸른 빛을 내뿜는 나무와 잔디가 마음대로 자라난 땅바닥밖에 안보였다. 별들은 사실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다. 성능좋은 망원경으로 보면 그들이 떨리는 걸 볼 수 있다고 했다. 학교는 이 광경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 무너져내릴 것 같이 보였다. 아직까진 무너지지 않았지만. 
" 그냥 말이 그렇다고," 너는 네 말이 올바르지 않다고 트집잡아지면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렸었다. 트집을 잡는 역할은 내가 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 친한 친구가 서로 애틋한 무언가를 나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건 내가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네 말 대로, 매 시큰둥한 내가. 말이다. 메마른 감정들을 안고 너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둘은 정말로 사랑했다. 그것이 우정적이었던 연애적이었던. 
이야기는 끝이다.
사실 나란 아이는 촉촉한 입술을 메마르게 보이려 입으로 쉼을 쉬는 아이였으니까.
더 이상 이 엄청난 슬픔의 충격을 안으로 완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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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

우리 학교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엄청 길다.
진짜 보는 걸로는 부족하다.
직접 타봐야 이게 긴걸 아는데...
아쉽네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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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가만히 있어도 앞으로 가게 된다.
갑자기 반항심이 들어
뒤로 걸어도
결국은 제자리 걸음이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나와 쇼핑몰을 가야겠지.
그걸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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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하늘

사막은 언제나 뜨거운 햇살만이 내리쬐는 하늘일것만 같다.
하지만 밤이되면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별 무리들이 만개한다.
우린 사막에서 살지 않기에 그 속이 아름답지 않은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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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정류장

비 오는게 좋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느낌도 좋다.
하지만 비오는날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건
왠지 모르게 슬퍼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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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장소

아아, 보기만 해도 추억이 되살아나는 그 곳. 
오늘도 그 곳을 보자 발걸음이 멈춰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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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조금 실수해도 괜찮아
잘못된 길을 고집해도 괜찮아
우리가 바로잡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해봐
그 시기를 보내야 진정한 어른이 되지 않을까요
호기심을 배우지 못해 사고가 짧은 사람을
어느 누가 좋다고 반겨줄까
언제부터 비뚤어진 아이들은 영원히 비뚤린다고 보기 시작했었나
인간은 로봇이 아니라는 말부터 꺼내는 당신은 부하직원의 실수를 얼마나 눈감아주길래 그렇게 시원히 말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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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

멈추기라도 하면 모두가 뒤로 넘어질테니
손잡이를 잡아 모두의 안전망이 되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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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13년이 긴 시간이라 믿었어.
길고 깊은 시간이라고.
나는 네게 쌓아둔것들이 많았던 모양이야.
자그마치 13년이란 감정들이 있었나봐.
너는 참 대단해.
하루 아침에 13년을 물거품처럼 앗아갔어.
그 긴시간동안 쌓여온 감정들을
하루만에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었어.
13년이나 너를 지켜본,
13년이나 네 곁에 있었던 나는
13년이나 함께했지만
여전히 너를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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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반도의 생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가끔은 꿈을 꾸는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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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법을 몰라서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울고 싶은데 속 시원히 우는 법을 모른다
소리내어 우는 법도 모른다
그래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 없었으니
참는 법만 배워왔던 나에게는
소리내며 속 시원히 우는 게
오히려 어색하기에
그저 입술을 꾹 깨물수 밖에 없다
속 깊이 쌓여왔던 슬픔을 밀어내지 못한 채
오늘도 조용히 눈물을 삼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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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특유의 이성적인 소리가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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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짧은 삶은 나에겐 너무나 길게 느껴지니 
아아, 답답하구나. 마침표를 찍으랴, 끝내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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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나는 나비가 싫다.
우리 엄마가 너를 닮고 싶다고 하였다.
너처럼 자유롭게 꽃밭을 날아다니고 싶다했다.
나는 나비가 싫다.
꽃을 찾아 나풀나풀 가녀린 날갯짓 하는 그 모습이 끔직할 정도로 역겨웠다.
제 짝을 찾는 모습도, 꽃 위에 앉아 피곤한 날개를 쉬는 것도, 나는 그 모든게 역겹고 징그러웠다.
너의 그 가냘픈 날갯짓이 하늘하늘 눈 앞에서 사라질 때면, 그 날의 엄마가 떠올랐기에 나는 미칠듯이 네가 미웠다.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날개가 칼바람에 찢겨 돌아왔을땐 남몰래 누구보다 기뻐했으나,
후에 찢겨진 날개를 보니 썩 그 모습이 유쾌하지 않았다.
영영 돌아오지 말지.
나비처럼 도망가서 돌아오지 말 것이지.
그깟 자식이 뭐길래 날개를 다쳐 돌아온걸까.
그래서 나는 네가 싫다.
내 엄마를 닮아서
하늘하늘 춤추며 사라지더니,
칼바람에 날개가 찢겨 돌아와서는
다친 날개가 흉해 날아가지도 못하는.
꽃을 찾아 날갯짓 할 힘조차 없는.
너는 나의 엄마를 닮아 너무나 미운 나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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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나는 고양이가 친구다.
 말도 통하지 않아서 상처받지 않는다.
 새침해서 친해지기 어렵지만 사람보다 힘들까.
 심지어 뒤통수 칠일도 없다.
 사람보다 훨씬 낫지만
 고양이도 인간도 채워주지 못한 내 욕구
 단 한가지,
소속감
 나는 외톨이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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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오랜만에 바다에 갔다. 아니지 오랜만은 아니다. 바다에 오니 바다 특유의 비린 냄새와 함께 시원함이 몰려들었다. 
이 특유의 냄새. 어렸을 적에 자주 맡았던 냄새이다. 어렸을 때에는 비린 냄새가 싫어서 바다도 싫어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냄새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때는 해산물이나 생선을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바다의 탁 트인 그 넓은 모습을 보면 답답했던 내 마음도 탁 트인다. 어렸을 적 싫어했던 비린 바다 내음을 지금은 좋아라 하는것을 보면 내가 어느 순간 늙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속세에 찌들어 갑갑함을 안고 사는 나에게 바다는 일종의 약이다. 아주 일시적이지만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머릿속에서 몇날 며칠을 함께 했던 고민들도 잠시 내려놓게 된다. 잠시 내려놓고 생각한다. 오늘 같은 날은 편안히 바다를 보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일을 하느라, 돈을 버느라 자기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날에는 역시 바다를 한번쯤 들러보는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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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정류장

학교가 먼 탓에 지하철과 버스타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초중고는 가까운데 다닌 덕에 멀어야 도보로 25분 거리였다. 처음버스타고 다닐때는 어색했다. 시내버스도 아니고 빨간버스, 그니까 시외버스를 타야 했으니. 어색했다. 처음 학교 가던 날에 비가 왔었다. 버스가 올 때까지 비맞으며 정류장에 서있는데 한숨이 나왔다.
장마철에 어쩌지. 신발 젖는 거 싫은데. 이래서 가까운데 가라는 건가...
그렇게 속으로 한탄을 시작하니 끊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 상향지원할걸그랬나, 가고싶은 학과고 뭐고 가까운데 넣을걸 그랬나, 0.5등급만 더 높았으면 거기 넣어 볼 수 있었는데, 좀 더 내신 신경써볼 걸....
정류장에 혼자 서서 속으로 그러고있는데 점점 제 처지가 처량해졌다.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싶었다. 또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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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차(陶車)

 01

 w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 아침 먹자. 몽롱한 채로 식탁까지 이끌려 가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갤러리가 아닌 w의 오피스텔이다. 수도 없이 들락거린 곳인데 왜인지 눈에 걸리는 것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상하네. 나 왜 여기서 잤지?
 우리 같이 살아.
 으응. 하품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뭐라고? 그는 젓가락으로 접시의 두부를 반으로 나누며 말했다. 지금은 이천십칠 년이고 우리는 서른넷이야. 그의 눈은 아주 진지하고 목소리는 덤덤했다. 나는 목을 길게 뺐다가 이내 거북이처럼 움츠렸다.
 칠 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쳤거든. 후유증으로 기억장애가 생겨서 하루가 지나면 전부 잊어버려. 먹은 음식, 만난 사람, 했던 말…
 하하. 내가 잠이 덜 깼나…
 그래도 다행이지, 나는 기억해줘서.
 아니… 진짜?
 w는 그저 웃는다. 밥 먹어. 식겠다. 세상이 천천히 기울어지고 정신이 허공을 유영한다. 나는 참사를 목격한 행인이자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당사자였다. 마음이 빈 깍지처럼 으스러지는 것을 애써 모른 체했다. 눈물을 참기에는 그편이 나았다.
 02
 나가자기에 버스를 탈 줄 알았는데 집 앞에 차가 세워져 있다. 앙증맞은 진녹색 허슬러. 이름은 봉봉이라고 했다. 사람이라도 칠까 무서워서 면허는 안 따겠다던 w는 여기저기 불법주차 된 차들을 잘도 피해 금세 대로로 나왔다.
 우리 어디 가?
 일하러.
 ……나 갤러리 안 잘렸어?
 잘렸지. 그래도 관장이 너 워낙 좋아했잖아. 아직도 그림 들고 가면 꼭 받아 줘. 가끔 전시에도 한 두 점 끼워 주고.
 남에게 나의 근황을 듣는 건 이상한 일이다. 묘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차가 신호등에 걸리자 w는 핸들에서 뗀 왼손을 내 손 위로 덮는다. 불안할 때마다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생긴 습관이었다.
 우리 카페 차렸다.
 어?
 저기 앞 골목에. 개업한 지는 삼 년 좀 넘었어.
 카페는 둘의 로망이자 이리저리 그려보던 미래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입을 열기도 전에 w는 내가 할 질문을 알고 덧붙였다.
 우리 작업실도 있어. 마음에 들 거야.
 그가 장담한 만큼 카페는 근사했다. 소파며 쿠션, 테이블 위로 길게 내려온 펜던트 조명, 선반의 작은 소품까지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w는 약간 뿌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같이 골랐으니까 당연하지. 우리는 카운터 앞의 바 테이블에 앉아 그가 내린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내가 모르는 일을 익히 해내는, 흙물 없이 깨끗한 w의 손이 서먹하다. 기억 너머에 존재할 그의 고생을 생각하자 나는 숨 쉬는 숨결마저 새삼스럽고 낯설어졌다.
 오픈 준비가 끝나자 w는 작업실로 나를 데려갔다. 아주 넓지는 않아도 작업하기에는 충분했다. 여기가 네 자리고, 이쪽 물레가 내 자리. 중고지만 가마도 있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부하게도 꿈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분명 현실이었다. 내 그림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촘촘히 쌓아 올린 익숙한 터치. 강하게 때린 빛 아래 흘러내리듯 묘사한 그림자. 테레빈과 린시드 오일을 많이 섞어 흘러내리게 만드는 특유의 방식. 그린 기억은 없지만 내 그림이다. 넋을 잃은 나를 W는 익숙하게 자리에 앉히고 팔레트를 건네주었다.
 앉아서 편하게 작업 해. 이따 점심에만 좀 도와줘.
 w가 나가자 잡다한 감상은 사라지고, 그림과 나만이 남았다. 캔버스 아래 널브러진 붓을 집어 들었다.
 03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한가해진 오후에 w는 말려둔 그릇의 굽을 깎고 초벌을 구웠다. 그동안은 내가 카운터를 지켰다. 책을 읽다 지루해진 나는 커피 머신을 만져보고 식기를 구경했다. 이제 보니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다. 어두운 조명 밑에서도 은은히 유백색 빛을 발하는 것이 그를 닮았다.
 …우리 결혼도 못 했잖아.
 혼잣말에 가깝게 중얼거린 것을 용케 듣고 w가 대꾸했다. 할까? 내가 그러자면 당장 내일이라도 할 사람처럼. 아니야. 짧은 대답을 간신히 쥐어짜 내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소리가 내 심장에서 난 것만 같다.
 04
  날고 기는 천재들 사이에서 죽어가던 나를 그가 살려냈다.
 복학을 미루며 하루의 반은 술로, 나머지 반은 그림으로 보내던 휴학생 시절. 교내를 서성이다 들어간 도예과 전시에서 w를 처음 만났다. 평일 아침인 데다 졸전도 아니라서, 사람이라고는 앉아서 조는 스태프 한 명뿐이었다. 어쩐지 불쌍한 모양새라 슬쩍 깨웠더니 놀라서 퍼드덕 일어난다. 안내해 줄 수 있냐는 말에 그럼요, 고개를 끄덕이던 w. 갓 입학한 새내기처럼 반짝거리는 얼굴로 설명해주는 w.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돈 우리는 같이 스태프 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w가 종이컵에 타 온 인스턴트커피를 들고.
 그럼 산디에서 도예로 전과한 거예요?
 네. 근데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거기 가서 뭐 먹고 살려고 그러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대학 원서 쓸 적에 담임도 그러지 않았던가. 회화과 말고 차라리 디자인과를 쓰는 게 어떠니. w는 활짝 웃으면서도 결연한 눈을 하고 말했다. 저는 후회 안 해요. 왜인지 그 모습이 나를 스스로 다독이게 했다.
 그는 모습이 많았다. 꾸몄을 때와 편할 때가 아주 달랐고 말할 때와 가만히 웃을 때가 또 달랐다. 밖에서 만나는 말끔한 모습도, 작업실에서 흙투성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도. 전부 그려서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작업을 빛나게 할 아이디어를 자주 떠올려냈고, 그게 곧 둘을 쓸어 담는 힘이었다. 불안히 술렁이는 파도가 곧 내 인생이라고 체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랬다.
 05
 w의 말대로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 올리자 흉터가 보인다. 뒤통수부터 관자놀이 근처까지 길게 이어진 하나의 선. 종일 나를 베었던 선득한 현실감이 이번에는 멀리 달아났다. 내가 나에게서 아주 멀어졌다. 앞에 있는 거울은 누군가 나를 속여먹기 위해 그려둔 그림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져서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리고 얼른 소파로 가 앉았다. w는 바닥에 앉아 가계부를 쓰고 있었다. 얇은 티셔츠 위로 드러난 둥근 등에서 세월을 느꼈다. 구부리면 척추가 살짝 불거지던 그의 맨 등을 좋아했는데. 준비되지 않은 말이 팝콘처럼 툭 튀겨져 나왔다.
 나 혼자 물레 위에서 뛰고 있는 것 같아.
 w가 펜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본다. 그는 영문 모르겠다는 웃음을 지었다. 일과로 잊었던 절망감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 무력하게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않으려고 종일 애썼던 것은 헛수고가 되었다.
 숨 가쁘게 뛰어도 영원히 제자리일 거 아냐.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 w는 소파 위로 올라와 나를 끌어안았다. 귓가에 가벼운 한숨이 스친다. 말을 고르고 있구나. 그의 등에 팔을 두르고 기다렸다. 따듯한 체온에 기대어 물먹은 마음도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w가 뱉은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있잖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기억손실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기울어진 나를 영영 무너트리는 말. 그를 힘껏 밀쳐내고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만약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한 충격 요법이라면 성공이다. 배신감으로 싸늘히 얼어붙어서 이제는 찔러 죽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네가 물어봤거든. 왜 여태 안 도망갔냐고. 안 질리느냐고.
 …….
 그때는 차마 대답을 못 했는데.
 일갈하듯 소리쳤다. 말하지 마. 그러나 결국 듣게 되리라는 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소용없으리란 걸 직감으로 알았다. w는 그가 언제나 그랬듯 사근사근 봄볕처럼 속삭였다. 너는 언제까지나 내게 목매던 시절의 너로 남아 줄 테고,
 나는 이제 사랑해달라고 구걸하지 않아도 되니까.
 송곳 같은 밤. 삼백 호쯤 되는 캔버스 가득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고운 얼굴. 그 얼굴이 절벽 끝에 간신히 매달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웃는다. 나를 아득한 심해로 던져 넣는다. w의 팔이 얼어붙은 몸을 다시 감싸 안았다. 이번에는 밀쳐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가 물에 적셔 마구 뭉쳐놓은 휴지 덩어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미안해.
 곧 내일이 올 거야.
0 0

비 오는 정류장

추적추적 빗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늘어만 가는 빗방울을 보곤 한숨 쉬었다. 이래서야 집에 어떻게 돌아가라고. 버스를 타고 간다지만 축축한 채 집에 도착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아까까지만 해도 밝던 하늘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일기예보라도 챙겨볼걸. 그럼 우산이라도 있었을텐데. 비에 반쯤 젖어버린 책가방과 교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분명 잘 말려야겠지. 버스가 오고가고,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수 번 보았다. 운도 참 없지, 내리는 비를 받아내었던 어깨는 젖어 차가워진 옷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전 재산인 천원짜리 지폐 세 장과 동전 두어 개 정도가 눈에 띌 뿐이었다. 이래서야 비를 피할수도 우산을 살 수도 없잖아. 깊게 한숨쉬고는 이전보다 한껏 어두워진 하늘을 응시했다. 운도 없고, 기분도 별로 좋지 않은 하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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